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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질문에… 시민의 뜻모아 '기억의 조각' 빚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7)]

이영지
이영지 기자 bbangzi@kyeongin.com
입력 2024-04-23 19:34 수정 2024-04-24 14:13

설립 과정 민간 주도… 정치권까지 합심
10여년 시간 '정치적 논쟁' 좌초 위기도
독일에 대한 이해 일부로서 의미 갖게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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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비석은 24시간 관람 가능하다. 2024.4.13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설립 과정에서 시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정치권에서도 뜻을 모았다는 특징을 가진다.

1988년 처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제안한 것은 저널리스트 레아 로쉬였다. 그는 역사가 에버하르트 야켈과 함께 시민단체 '퍼스펙티브 베를린(Perspektive Berlin)'의 요청을 받아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

당초 이들은 베를린 남부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이후 헬무트 콜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던 인근 부지 제공에 동의하면서 지금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다.



퍼스펙티브 베를린은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서명을 모았고, 1999년 독일 연방의회는 기념비와 이를 관리할 재단을 설립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건축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피터 아이젠만이 선정되는 등의 논의를 거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2005년 5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69주년에 맞춰 개관했으며, 기념비 설립이 제안된 지 17년 만이었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할 점은 시민사회가 주도한 서명 운동과 시민 발의 결의안이다. 시민사회가 지식인들과 뜻을 모아 의견을 전달한 과정이 있었기에 독일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물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또한 설립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94년 개최된 첫 공모전의 당선작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념비 건립 사업까지 좌초될 위기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두고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순탄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시민사회가 합심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완성됐고, 베를린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었다.

베를린 투로대학(Touro College Berlin)의 유대인 연구 전공 스테판 렌슈테트 교수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건립 과정을 볼 때, 거의 모든 경우에 추모와 추모를 요구한 것은 시민사회였다"며 "실제로 추모비를 건립하고 자금을 조달하려면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건립에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결국 독일 국가에 대한 이해의 일부로서 의미를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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