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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기레기'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

이영지
이영지 bbangzi@kyeongin.com
입력 2024-05-08 19:54 수정 2024-05-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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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지 정치부 기자
고등학생 시절, 동아리시간에 교내 신문부에서 글을 쓰며 기자를 꿈꿨다. 당시 교내 신문 '기자발언대'에서 '기레기'라는 신조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의 성급한 취재 방식으로 언론이 한창 대중에게 질타받고 있을 시기였다. 글은 '모든 언론이 그렇지만은 않으니 기레기라고 부르진 말아주십사'하는 호소이자, 그런 기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세월호 참사를 취재하는 기자가 됐다. 10년 전 다짐한 기억이 남아 있어 참사 유가족과의 만남에서 어느 때보다도 긴장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방심했다.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취재를 떠나기 전, 독일인들의 생각을 묻고자 지인을 통해 이메일로 기사 취지와 함께 질문지를 보냈더니 돌아온 답장은 "단순 배 사고와 유대인 참사를 비교하면 안된다.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 배 사고가 아니라는 기자의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호한 답변에 대한 답장으로 뒤늦은 설명을 추가했지만 그에게는 취재를 이어가지 못했다. '기레기가 된 건 아닌가'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앞에서 만난 독일인 노부부에겐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취재에 응한 노부부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 독일의 반성 문화를 장황하게 늘어놓다 별안간 기자에게 "한국인 기자의 생각은 어떻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역질문을 하는 노부부의 눈빛에 '기자의 생각'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직도 인터넷엔 기레기를 욕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그런데 기레기라는 단어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기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기대에 부합하려면 기자는 부단히 생각하고 설명해야 한다. 기자의 언어로 감히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말이다. 10년 전 순수하고도 추상적이었던 다짐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영지 정치부 기자 bbangz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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