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삶을 유지하는 조건
아들의 '1형 당뇨' 진단… 혈당관리 분투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경제력 뒷받침에
감사하며 살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 생겨
'엄마 보호자' 된 8살… 병실서 수발 들어
공부시간 빼고 둘이 하나처럼 시간 공유
"노래하고 싶어" 내뱉고 밀려오던 원망
정보·대체 인력·비용적 여유 '핵심 요소'
인식조사 1천명 중 "준비 안돼" 응답 73%
하나라도 없다면 '가족 삶' 송두리째 흔들
가족돌봄청년 주당 평균 21.6시간 돌봄
'영케어러 삶' 일반 청년보다 2배 불만족
사회진출 등 '미래 포기' 정서적 불안감
준서(가명·12)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인슐린 펌프. 인슐린 펌프를 찬 뒤로 준서는 ‘주사 바늘의 공포’에서 해방됐다. /김은희씨 제공
다음은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 이정민(가명·20대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 '시간 빈곤'
"엄마, 나 몸이 이상한 거 같아."
2021년, 초등학교 3학년인 준서(가명)의 몸무게가 불과 일주일 사이 10kg이나 빠졌다.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가 쓰러졌다. 의사는 준서에게 '1형 당뇨'를 진단했다.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는 희귀 난치성 질환, 평생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병. 내가 흔들리면 준서의 삶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 내 아들의, 우리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리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들과 나, 그리고 친정엄마의 시선이 나란히 한 곳에 꽂혔다. 노트북에 펼쳐진 혈당 차트 속 그래프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5분 마다 업데이트되는 차트를 보며 머릿속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엄마, 여기 잘 봐. 이럴 때는 오렌지 주스야. 내가 카톡으로 '주입' 이렇게 보내면 여기까지 한 칸만 먹이는 거야. 준서도 똑바로 잘 들어. 할머니도 없고 엄마랑 아빠 회사에 가 있을 때 학교에서는 준서가 혼자서 해내야 해."
회사 연구실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5분에 한 번씩 차트를 보며 준서의 혈당을 체크한다. 외출할 때면 풀충전된 배터리, aa 건전지 여유분, 트레시바, 글루카곤, 알코올 스왑 등을 챙긴다.
24시간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래도 남들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준서 옆에서 밀착 케어할 필요가 없다는 데 감사했다. 15분 거리에 살면서 손자를 돌보러 기꺼이 달려와 주는 친정엄마에게. 그리고 무수한 지식과 경제력 따위의 내게 주어진 조건들에 감사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흘러가야 하는 삶에 안심이 되다가도 왠지 모를 서글픔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난다. 간병을 하다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고군분투해도 간병과 일상 사이에서 무게 추가 간병으로 쏠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 알고 있다. 가족을 간병하는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며,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며 긍정해보지만 정체 모를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김은희씨 사례를 통해 '가족 간병 vs 일상'이 아닌, '가족 간병―일상'이라는 명제를 성립하게 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확인했다. 영어로 된 해외 의료사이트를 해석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우위력', 언제든 준서에게 달려가 줄 친정어머니가 있는 '돌봄 인력', 가감 없이 의료비를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김씨 가족이 가족 간병을 하면서도 보통 가정처럼 외형적인 완벽함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와 돌봄 인력은 가족 간병을 위한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지난해 7월 한국리서치가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간병이 필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 - 간병에 대한 인식 조사'를 보면 응답자 중 95%가 경제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긍정하면서도 현재 준비가 돼있냐는 물음엔 7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돌봄인력 역시 63%가 본인 혹은 가족이 간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정보도 없고, 돌봄인력도 마땅치 않은데,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가족 중 누군가 아프다면 아마도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비교적 환경이 좋은 편에 속하는 김씨의 일상에 적용해봐도 동일한 결과다. 만약 친정어머니라는 '돌봄 인력'이 없다면 남편과 김씨 중 한 명은 직장을 그만두고 준서를 옆에서 돌봐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일을 그만둔다면 '경제적 여유'가 사라지고 의료비에 쏟을 비용도 자연스레 줄어든다.
한치라도 어긋났을 때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김씨도 늘 대비하며 오차 없이 살고 있지만,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게 '시간빈곤' 문제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김씨 역시 커리어를 유지하는 정도의 일상을 지키는 것 외엔 모든 일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족 돌봄 문제를 연구한 김정훈 경기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개인이 좋은 삶과 자기 행복권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자기 행복권을 추구한다는 건 시공간이 같이 주어져야 한다. 시간 빈곤은 결국 '시간 결핍'을 뜻하는데, 가족 간병을 하는 동안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며 "가족 간병 즉, 돌봄 이외의 시간에 대해 자기가 계획을 할 수 있고 오히려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고 설명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1형 당뇨를 앓는 아들 준서를 돌보고 있는 김은희씨의 일상은 정말 무사한가.
지난 2일 경기도 내 한 카페에서 이정민(가명·20대초반)씨를 만났다. 아픈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정민씨는 8살 때부터 엄마의 간병인이 되었다.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
기사 전문 온라인 |
관련기사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