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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당선작] 아버지의 집 (전윤희)

경인일보 발행일 2006-01-02 제0면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죽으면서 내게 유산을 남겼다고 했다. 이복동생이라는 젊은 남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키가 180센티미터는 족히 됨직한 그는 입 언저리가 내 아들과 닮아있었다. 그는 나보다 열 살 가량 어려 보였다. 벽을 훤하게 튼 유리창이 투명한 카페에서였다. 유월 햇살의 세밀한 결까지 다 보일 듯했다. 한 무더기의 햇살이 그 남자의 얼굴에서 부서졌고 그 위에 다시 햇살이 쏟아졌다. 스피커에선 비틀스의 ‘헤이 쥬드’가 들렸다. 헤이, 쥬드.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구……. 여느 때 같으면 흥얼거렸을 익숙한 곡이다. 하지만 지독히도 어색한 시간이었다. 그는 오렌지 주스가 들어있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내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라는 듯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밝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음에도 그의 까칠한 얼굴은 초췌했다.

 가평에 있어요. 아버지가 재혼하시기 전이라니까 아마 아실 텐데요. 젊은 남자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 가물가물하다는 표정으로 응답했다. 실제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가평에 아버지가 땅을 샀었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 땅에 집을 지었다고? 나는 한동안 혼자 골똘했다. 저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그가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며 흘리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성역이라도 되는 양, 그 곳엔 늘 혼자 가셨죠.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성역처럼 지켜 온 가평 집을 내게 물려준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은 것일까? 그가 내다보는 창 너머로 연초록의 신록이 눈부셨다. 카페가 면한 공원에는 몇 무리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펄럭이는 스커트 속의 두 다리에 힘을 팍팍 줘가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여자 애들. 미니 자동차를 하나 빌려서는 서로 타겠다고 밀쳐대는 어린 남매. 벤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 밖은 한없이 경쾌해보였다. 오직 그와 내가 자리한 탁자 위의 공기만 지구만큼 무거웠다. 이번엔 내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의 눈치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이상할 만큼 그 남자에 대해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먼 타인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엔 분명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눠져 있을 텐데, 나는 조금의 친밀감도 조금의 질투심도 느끼지 않았다. 아마도 내 속에 흐르던 아버지의 피가 다 말라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남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남편에게 먼저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가 내놓은 은빛 열쇠꾸러미와 주소가 적힌 종이가 난감했다. 양평 이모 집에 살고 있는 엄마에게 알리는 것은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두 노인네가 손바닥만한 텃밭을 메며 모자랄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는 듯 이루어낸 척박한 평화를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행선지도 정하지 못한 채 내 앞에 정차한 택시에 올랐다. 삼성동이요, 아니 사당동이요, 아니 삼성……. 어딜 가냐고 운전사가 두 번째 물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과 신경질이 뒤섞여있었다. 나는 무안한 듯 과천이요, 하고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남편과 점심을 먹으며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은 그럴만한 문제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나 자신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그에게 불쑥 들이밀 수는 없었다. 묵직한 열쇠꾸러미와 낯선 주소와 함께.




 영주의 작업실은 과천 정부종합청사 근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근처 어느 오래된 건물 지하에 있었다. 어둡고 눅눅한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는 시커먼 물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만한 생쥐였다. 소름이 살갗에 파르르 일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속이 메스꺼웠다. 집으로 곧바로 가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무난한 집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남편보단 가난하고 난폭한 부모 밑에서 어두운 유년을 보낸 영주가 이럴 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너를 버린 아버지가 너한테 집을 남겨주고 죽었단 말이지? 횡설수설 비슷하게 그 남자를 만났던 일을 찔끔찔끔 흘렸는데 영주는 단칼로 자르듯 한마디로 정리했다. 나는 나를 버렸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간단하네. 팔아버려! 그녀의 ‘팔아버려’는 너무도 쉽고 힘이 넘쳤다. 팔아서 너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진우 먹고 싶은 거 사주고 다 써버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 본래 영주는 거침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영주는 그리던 만화를 계속 그렸고 나는 주전자에 물을 받아 브루스타에서 끓여냈다.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내 몸속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널브러져있는 커피 믹스로 두 잔의 커피를 만들었다. 영주가 일하고 있는 책상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댔다. 안 그래도 바지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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