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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위의 식사 (190)

경인일보 발행일 2006-09-27 제13면

뒤집힌 연못 ⑨

   

하지만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한 근본 동기는, 서승돈의 능력을 일찍 간파한 김상도의 판단력만이 아니다. 또 있다. 죽은 아우 김상수다. 서승돈은 김상수와 고등학교 동창 관계다. 막내아우는 영국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

“회장님, 저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만, 제 동기 한 명이 영림전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은근히 청탁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공군 사관학교를 수석 입학한 수재라는 추천사보다 성격이 차분하고 고분고분해서 아우들 중 가장 신뢰가 두터웠던 동생의 말인 터라, 김상도가 서슴없이 관심을 보였던가.



“공군 사관학교라면 비행기 조종사 되는 코스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비행기 조종은 하지 않고 우리 회사에 입사한 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그렇지만 그 친구 숙부되는 분이 이번에 예편한 조근상 장군 아닙니까?”

“조근상 장군? 육군 참모총장 지낸 사람 말이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꽤나 괜찮은 집안 출신이구만.”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퇴역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다가…생각하는 바 있어 입사했다는 겁니다. 참, 그 친구 고등학교 다닐 때 총 학생회장도 지냈고, 그래서 집에도 몇 번 놀러 왔다가…회장님께 인사도 드렸습니다.”

“학생회장? 그런 감투나 좋아했으니 사법고시에 낙방할 수밖에.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공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그거 하나 패스 못했겠냐? 아예 그런 녀석하고는 상종하지 마라.”

“아닙니다. 회장님. 그 녀석은 잘 다듬기만 하면 분명 크게 쓸 재목감입니다. 한 번 눈여겨 봐 주십시오.”

“알았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게 천거한다면…눈여겨 볼 수밖에.”

“감사합니다, 회장님.”

처음이고 마지막인 막내 아우의 부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사람을 천거할 수 없게끔 대서양에서 산화해 버린 막내아우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일까. 정말 죽은 김상수가 그리워질 때마다 김상도는 서승돈을 불렀고, 그 서승돈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막내 아우의 여린 실루엣을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

그처럼 완전히 발가벗고 키워 내다시피한 서승돈이 과연 어떻게 나왔는가. 제놈 잘 나서 출세한 것으로 착각하다 못해, 영림전자 대표이사로 올라앉자마자 모든 임원이며 기술 개발, 자재 구매, 인사총무 따위 소위 말하는 황금어장 자리 책임자를 서승돈 직계 라인으로 온통 개조해 버린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다른쪽 라인은 운신을 못하게시리 족쇄를 지르거나, 아예 도태시켜 버린 것이다. 하다못해 김상도가 직접 심어 놓은 사람까지 새마을 담당관이니, 기숙사 관리책임자니 하는 별 볼일 없는 직책을 달아 간신히 연명만 시킬 정도인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뭔가 혁신적인 경영 방향을 잡기 위한 새 포석이려니 하고 조였던 고삐를 다소 늦추곤 했는데, 웬걸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영림전자가 온통 서승돈 사병만으로 득실거릴 뿐 아니라, 큰 일에서 작은 일까지 서승돈의 지시, 서승돈의 사인이 아니고는 도무지 통용될 기미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룹 총수인 김상도가 지시를 내리는데도 열중쉬어 자세로, ‘서승돈 사장님의 오더를 받는 즉시 실시하겠습니다’ 식으로 요지부동이니 더 이상 거론해 무엇하랴.

하나, 그것 역시 꼬투리 잡아 닦달할 명분이 없다. 왜냐면 영림전자가 서승돈 체제로 바뀌고 나서 부쩍 신장률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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