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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수재(水災)와 영조의 대처

김준혁 발행일 2014-04-21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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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1729년(영조 5) 윤7월. 함경도에 때아닌 큰 수재(水災)가 발생했다. 홍수가 발생하기 직전 경상도에서 기형의 송아지가 태어나고, 황해도 서흥에서는 죽은 배나무에서 갑자기 꽃이 피는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조정에서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함경도 일대에서 엄청난 폭우가 10일 이상 계속되었다.

전례없는 폭우에 함경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함경도 일대에서 일어난 수재 피해 상황은 함경도 관찰사가 보내온 것 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함경도 관찰사 송진명이 수재 상황을 축소 보고하여 조정은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상황은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함흥의 명물인 만세교(萬歲橋)가 하루만에 떠내려 가고 , 도련포 목장의 말이 80마리나 익사하였으며, 이성(利城)이라는 작은 고을은 민가가 360호나 떠나려가서 폐허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덕원의 원산포구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덕원부사가 날마다 시신을 묻기 바쁠 정도였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본궁(咸興本宮)마저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성한 공간인 함흥본궁마저 무너진 상황이었으니 당시 수재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함경도의 수재에 대하여 좌의정 이태좌는 자신의 관료 기간 중 처음 겪는 엄청난 사건이어서 벼슬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여러 행사를 정지하고 빠르게 대처하기를 청원하였다. 더불어 조정 관료의 대표 자격으로 특진관 이정제는 함경도에 어사를 보내어 수재 피해 대책을 마련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영조는 아무나 어사를 보내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북평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종성에게 '위유안집어사(慰諭安集御史)' 임무를 맡기라고 하였다. 이종성은 조정에서 매우 능력있는 고위 관료였다. 정확한 판단력과 인품을 갖춘 이종성이 함경도로 가야만이 정확한 진상조사와 해결을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국왕 영조는 늘 나라에 재난을 만나면 군왕이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신속하면서 책임있게 처리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백성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이종성을 함경도로 파견하고 영남지역 곡식 1만석과 평안도의 돈 1만냥을 함경도로 보내 피해를 해결하라고 하였다. 이종성은 곧바로 함경도로 달려가서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영조에게 수재를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후 백성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심각했던 함경도 대홍수는 잘 마무리 되었다.

최근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미래의 주역이 될 꿈이 많은 안산 단원고 학생들 수 백명이 깊은 바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세월호의 위기 상황에 선장을 비롯한 선박 관계자들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선박의 위기에 대한 보고를 받은 정부의 무능한 대처가 오늘 이 엄청난 사건을 만든 것이다. 하다못해 조선시대에도 국가 재난이 생기면 책임있고 능력있는 인사를 파견하여 일을 올바르게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21세기인 오늘 우리 정부는 그런 대처를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을 떠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며,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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