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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0]평택·화성의 관방유적

김신태 김신태 기자 발행일 2014-07-30 제9면

해안 인접 지역 '방어의 역사'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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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안정리 농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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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와 육로·수로가 연결되는 요충지
산성·봉수대 축조해 침입자 상륙 막아

평택 안정리 농성 유일하게 보존 양호
다른 성곽문화재 유실돼 규모만 짐작
화성 당성 건물터·우물터만 남아있어


평택시가 지난 2004년과 2007년에 각각 발간한 평택서부 관방산성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아산만과 주변 지역은 내륙 수로와 육로가 서해 연안항로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으로 중요시돼 왔던 지역이다.

교통의 요충지는 곧 군사적 요충지가 된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는 서해에서 아산만을 통해 중부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꼭 확보해야 할 요충지였다. 따라서 곳곳의 야산에는 산성이나 봉수대를 축조해 적대적인 세력이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고자 했다.



특히 남양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당항진은 대(對) 중국교역의 영향으로 삼국이 이 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당항진의 군사적 중요성은 다소 약화됐지만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했다.

고려 성종 12년경 아주(牙州·충남 아산시의 고려시대 이름)에 하양창(고려시대 세미(稅米)의 운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조창(漕倉)의 하나)이 설치된 이후 아산만은 조운(漕運)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고려 후기 이후 주변에 간석지가 농토로 개간되면서 점차 농업생산력이 확대됐고 인구도 증가했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왜구의 약탈이 이 곳에 집중되면서 피해가 극심했다.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중앙정부에서는 이 지역의 해안방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곳곳에 성곽(城郭)을 축조, 왜구의 상륙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안성천 하구와 아산만 일대에는 당시에 축조하거나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분포돼 있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 따르면 평택 서부지역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봉수(烽燧)대가 분포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곽들은 현재 간척사업 등으로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지만 원래의 지형을 고려하면 대부분 해안에 위치한 구릉이나 야산에 축조된 것들이다. 일종의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성곽들이다.

평택서부지역에 위치한 성곽들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언급돼 있지 않아 축조시기와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위치로 볼때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의 해안방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유적들로 주목받고 있다.

성곽과 봉수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 바로 관방유적(關防遺蹟).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방어체계 및 문화양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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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기념물 206호 평택 덕목리성지 안내 표지.
평택지역에는 농성을 비롯해 경기도지정 성곽문화재만 6개에 달하지만 농성과 덕목리성지에만 안내판이 세워져 있을뿐 나머지 성지에서는 안내판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그나마 농성만 체육공원으로 조성돼 관리가 되고 있을뿐 대부분의 성지들은 사유지여서 각종 개발과 인근 주민들의 농사, 분묘 등의 조성으로 지금은 그 위치와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안정리 농성(경기도기념물 74호)은 팽성읍사무소로부터 1.5㎞정도 떨어져 있다. 평지성인 농성은 삼국시대에 도적이 심해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해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농성은 해발 24m의 낮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축조됐다. 전체 둘레는 332m다. 성내부에는 5천964㎡의 평탄지가 형성돼 있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현재 체육공원으로 복원된 농성 앞에는 안내판과 함께 임팔급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덕목리성지(경기도기념물 206호)가 위치해 있는 현덕면 덕목리 원덕목 마을은 통일신라시대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가운데 하나였던 광덕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덕목리성지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눠져 있는 평지 토축성이다. 서성은 1980년대 이뤄진 경지정리로 동벽과 서벽 일부, 남벽 전체가 유실된 상태지만 북벽과 동벽의 일부, 그리고 서벽의 일부가 남아있어 이전의 성의 규모를 짐작케할 뿐이다. 그리고 서성 한 가운데에는 밭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동성의 경우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어 성의 형태나 그 규모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나마 덕목리성지에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어 이 곳이 덕목리성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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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안정리 농성 내부 모습.
무성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2호)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해발 104.7m의 무성산에 조성돼 있다. 산 정상부에는 이동통신 기지국 송신탑이 세워져 있다. 무성산성에 관한 기록은 1942년 일제가 편찬한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에 처음 등장한다.

1977년 편찬한 문화유적 총람에는 "이 일대는 자미산, 피라산이 남쪽으로 연결되는데 위치해 있으며 속칭 퇴미산이라 부르는 산정(山頂)에 있다. 높이 약 4m, 폭 3m, 주위 800m의 이 성지는 조선초기 임경업 장군이 자미산성 쌓기 내기를 한 전설과 연관된 성으로 전해질뿐 확실한 연혁이나 사적은 알 수 없다"고 돼 있다.

이 산성은 해양과 인접한 지형때문에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간척사업이 있기전 무성산 서남쪽 옥길리 신기마을 해망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무성산 남쪽방면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중면 학현리에도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특히 무성산 동쪽 용성현은 고려초까지만 해도 독립된 현(縣)으로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어서 군사적 방비가 크게 요구되던 지역이었다. 현재 무성산성지에는 참호 등 군시설물들로 인해 훼손이 심한 상태다.

지금 간척사업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그 옛날 바닷가였던 안중읍 용성리 일대에는 산성이 많다. 자미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3호), 비파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4호), 용성리성지(경기도기념물 205호) 등이다. 이중 대표적인 산성은 자미산성과 비파산성이다.

비파산성은 1천600여m나 되는 포곡식 산성으로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용성현의 읍치(邑治)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자미산성은 평택지역에서는 드물게 돌로 쌓은 석성이다.

용성리 일대에 성곽이 많은 것은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운로나 조창이 있는 지역에 자주 출몰했는데 고려시대 전국 13대 조창이 있었던 경양현(팽성읍)이나 용성현이 자주 습격을 당했다.

대당(對唐) 무역항인 당항진을 배후로 낀 남양만 일대는 조선 중기 효종 이전까지 수군(水軍) 기지인 영종포영첨사(永宗浦營僉使)가 자리잡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당성(唐城)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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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217호 화성 당성의 우물터.
화성 당성(사적 217호,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위치)은 당항성이라고도 한다. 둘레 1.2㎞로 계곡을 따라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산정상에서 서해가 보인다.

원효대사가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던 도중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이 당성 일대란 학설도 있다. 현재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 지역은 처음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영토로 한때 편입되면서 당성군이라 했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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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당항성이라고 불렀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지만 신라 경덕왕때는 당은군으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 후기에는 당성진을 설치해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됐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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