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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꼬마기차 수여선·수인선을 아시나요

김찬수 기자 발행일 2015-04-07 제18면

근대화 상징이자 日야욕의 산물
수인선 폐선 1995년 자취 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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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여선 운행 화차
비용 절감 차원 ‘협궤열차’로 제작
광복후에도 수십년간 시민 발노릇

지금은 사라진 꼬마기차 수여선, 수인선을 아시나요?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교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잘 발달한 교통로가 있어야 많은 물자와 사람들이 쉼 없이 오가며 교역과 교류를 할 수 있고, 그래야 나라의 경제력이 커지고 더불어 국력이 강해지며 문화도 꽃피우게 됩니다.

말을 이용하는 육상 교통로를 잘 갖추었던 몽골제국과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도록 육상과 해상 교통로를 잘 뚫어놓았던 로마제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크게 발전했던 때는 교통로가 잘 발달되었던 때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넓은 영토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육상과 해상 교통을 잘 이용한 결과이고, 신라의 진흥왕도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황해로 나아가서 중국과 교역하면서 발전했으며, 해상왕 장보고 장군이 완도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과 무역을 통해 크게 번성했던 것도 다 해상 교통로를 잘 이용한 덕분입니다.

그런데 말과 수레를 이용하던 전근대시대와 다르게 19세기 개항기에는 새로운 육상 교통수단이 등장했으니, 그것은 바로 철도입니다. 철도는 빠르게 정해진 시간 안에 대량으로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장점이 있어요. 그래서 철도는 전기와 함께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철도가 뼈아픈 고통의 역사입니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먼저 철도를 통해 각종 이권을 빼앗깁니다. 일제는 철도를 자기들 생각한 대로 부설하고, 그 길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한 물자를 마음대로 가져갔으며 자기들이 만든 물건을 쉽게 대량으로 팔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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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시내 남아있는 수여선길 안내표시.
결국 일제의 침략 의도를 잘 몰랐던 조선은 1910년 주권을 완전히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일제 식민지가 되고 20여년이 흐른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남쪽지역의 쌀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철도를 만들었으니 수원과 여주 사이의 수여선, 수원과 인천 사이의 수인선입니다.

1931년 12월에 개통된 수여선은 수원역에서 여주역까지 73㎞이고, 1937년 8월 개통된 수인선은 수원역에서 인천역까지 52㎞를 왕복 운행하였어요.

수여선과 수인선을 통해 일제는 여주 이천지역의 쌀을 인천항으로 실어가 일본으로 가져갔고, 일본에서 생산된 공산품과 서해안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 등의 해산물을 내륙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런데 수여선, 수인선은 철로의 폭이 국가 중요철도의 표준궤 1천435㎜가 아닌 762㎜로 협궤였어요.

일제는 철도부설 자금과 물자가 부족하여 비용이 덜 드는 협궤로 만들었고, 그렇다보니 폭이 좁고 객차가 몇 칸 안 되는 꼬마 기차였어요. 속도도 아주 느렸고요. 운행 횟수도 하루 4번 정도였어요.

결국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독립된 후 철도시설을 국가가 관리하다가, 늘어나는 자동차 교통량에 밀려 수여선은 1972년 3월에, 수인선은 1995년 12월 31일에 완전히 운행이 정지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요. 지금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 중에는 수여선, 수인선의 꼬마기차를 탔던 추억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많답니다.

/ 김찬수 동원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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