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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옹진 인천20년 보석을 다듬자·30] 옹진군에 견고히 자리잡은 서양 종교

김성호 김성호 기자 발행일 2015-07-30 제9면

육지보다 먼저 ‘기도하다’
기독교에 마음 연 주민들, 섬마을에 뿌리 내린 복음의 씨앗

▲ 1896년 8월 25일 창립예배를 통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내부.
▲ 1896년 8월 25일 창립예배를 통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내부.
외래 문물 자주 접하고 진취적인 기질
서양 종교들 또한 쉽게 받아들였을 듯
중화동 교회 등 100년 넘는 역사 자랑
백령도, 한국천주교 전파 구심점 역할
최분도 신부 ‘서해낙도 슈바이처’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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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옹진군은 개신교와 천주교 등 기독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특성상 풍어제와 굿 등 무속 신앙이 발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등 여러 종교가 두루 분포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기독교의 교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옹진군의 특징은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옹진군의 종교현황을 살펴보면 옹진군 전체 인구 1만2천261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6천434명(52.4%)이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다. 개신교가 3천569명(29.1%), 천주교가 2천865명(23.3%)인데 반해 불교는 772명(6.29%)에 불과하다.



인천 전체 인구 251만7천680명 가운데 기독교가 36.11%, 불교가 13.8%로 나타나는 구성비를 보면 옹진군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인천 중구사 종교편과 ‘내리교회 110년사’ 등을 집필한 목회자이면서 향토사학자인 박철호(49)씨는 “섬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주민들은 외래 문물을 자주 접하고,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기질을 갖고 있어 외래 종교를 쉽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며 “초기 교회들이 선교활동과 더불어 교육사업에도 주력했던 점이 교육열이 높은 섬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연평도 성당의 성모상.
▲ 연평도 성당의 성모상.

#100년이 넘는 옹진군의 개신교 교회들

옹진군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백령도에 있는 중화동교회는 1896년 8월 25일 창립예배를 통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화동교회는 인천노회 최초의 교회로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연구 가치가 있다.

남한지역 최초의 자생 교회이자 백령지역 교회의 모태가 되는 교회다. 중화동교회는 한국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북한의 황해남도 장연군 소래교회에서 건축 재료를 가지고 와 1899년 건물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덕적도 북2리에 있는 감리교 소속인 덕수교회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덕수교회(당시 북리교회)는 덕적군도 지역 일대의 모태 교회로 1901년 매서인(賣書人: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인 이군선이 덕적도에 들어와서 기독교를 전도, 처음 예배를 하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섬에 있는 덕적중앙교회(당시 구포교회)는 북리교회(현 덕수교회) 출신 허광모씨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1911년 8월 구포 초가를 매입해 예배당으로 쓰다가 1913년 8월 신도들의 헌금으로 교회를 신축했다고 전해진다. 2006년 9월 12일에는 교회설립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가 있었다.

이와 함께 덕적제일교회(1908년), 덕적중앙교회(1911년)도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다.

영흥면의 영흥교회는 옹진군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펜젤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1893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흥면의 내동교회도 1906년 9월 24일 당시 내동에 거주하던 지역 유지 임연묵이 창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임연묵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전도와 세례를 받았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2006년 9월 24일에는 내동교회 100년사를 발행했다.

▲ 덕적도 북리 덕수교회 현교회 건물 뒤로 옛교회가 보이고 있다.
▲ 덕적도 북리 덕수교회 현교회 건물 뒤로 옛교회가 보이고 있다.

#옹진군에 뿌리내린 천주교

백령도는 우리나라 천주교 전래사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다.

백령도의 성당은 1959년 5월 9일 메리놀회의 부영발(Edaward Moffet) 신부가 정식 부임하면서 설립됐다. 부영발 신부는 오산기지 군종신부로 재직하다 백령도 주둔 미 공군기지를 왕래하며 백령도와 인연을 맺게 됐다. 부임 초기 성당건물이 없어 창고를 고쳐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백령도 진촌리 일대의 땅을 매입해 1969년까지 공소와 병원, 고아원 성당과 사택 수녀원 등을 건립했다. 김안드레아 병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시설과 의료진으로 구성된 종합병원 중의 하나로 육지에서도 치료를 위해 백령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연평도는 한국 천주교 200여년 역사와 인연이 깊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병오박해(1846)의 근원지다. 1922년 공소가 처음으로 세워지고 1958년 10월 20일 강주희 주임신부가 파견되며 본당으로 승격한다. 성당은 1959년 4월 22일 설립된다.

#서해낙도의 슈바이처 최분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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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분도(Benedict Zweber·1932~2001) 신부는 종교인으로서 옹진군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를 빼놓으면 인천 도서 지역 천주교 역사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는 요즘 같아도 하기 힘든 큰 일들을 종교인 신분으로 두려움 없이 해내며 기적을 일궈냈다.

특히 덕적도에서는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전기를 생산해 보급하고, 어민 소득을 늘리기 위한 해태(김) 양식을 시작하고, 간척사업을 벌여 농지를 늘리는 등의 수많은 사업을 펼쳤다.

이런 그의 업적 때문에 ‘인천 사람보다 더 인천을 사랑한 미국인’ ‘서해낙도의 슈바이처’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그는 1976년 당시 김태호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으며 ‘인천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최 신부는 1959년 메리놀 외방선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962년 연평도에 보좌신부로, 1966년에는 덕적도 주임 신부로 부임하며 1976년 덕적도를 떠날 때까지 인천에서의 30여년 선교활동 중 섬에서만 14년을 머물렀다. 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 인근에는 마을 주민들이 그가 떠나던 해 건립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덕적도에서 종교활동 말고도 섬을 힘들게 하는 ‘가난’ ‘질병’과의 싸움을 펼쳤다. 낡은 미군 함정을 인수해 ‘바다의 별’이라는 이름의 병원선을 띄웠고, 이후 ‘복자 유베드로 병원’을 세운다.

이 병원은 60병상에 외과·내과·산부인과·방사선과 등으로 이뤄진 덕적도의 종합병원 역할을 했다. 병원을 운영하자니 자연스레 전기가 필요했고, 뭍에서 발전기를 들여와 섬에 전기를 보급한다.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에 머무르며 뜻을 펼치는 동안 최 신부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마을 주민 서재송(86)씨다. 최 신부가 세상을 떠난 2001년 3월 30일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 대성당서 열린 장례 미사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이도 서 씨다.

그는 “최 신부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언제나 한결같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며 “예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섬 주민을 사랑으로 포용했다”고 그를 기억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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