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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수원 ‘만석거와 축만제’

김찬수 기자 발행일 2015-08-11 제18면

정조가 만든 저수지… 실학정신 깃든 농업의 원천

▲ 만석거. /동원고 제공
▲ 만석거. /동원고 제공
백성위해 운영한 국가농장 물 대기쉽게 조성
향후 농진청 들어서 ‘200년전 선진농업’ 계승


수원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과 ‘화성행궁(華城行宮)’입니다. 그래서 요즘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화성과 화성행궁은 개혁군주 정조와 조선 후기 실학 정신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수원 신도시와 화성, 화성행궁을 만들면서 수원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정조는 수원 성곽 안의 거리가 번창하도록 전국 상인들에게 수원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고, 더불어 화성 주변의 넓은 땅을 개간해 국가가 경영하는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농장에 물을 쉽게 댈 수 있도록 저수지를 동서남북에 4개 만들었답니다. 그 저수지가 바로 수원 북쪽 송죽동의 ‘만석거(萬石渠)’, 서쪽 서둔동의 ‘축만제(祝萬堤)’, 그리고 남쪽 화성시 안녕동의 ‘만년제(萬年堤)’입니다. 동쪽의 지동(池洞)에도 큰 못이 분명 있었을 텐데 지금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북쪽의 만석거는 지금의 정자동 일대에 있던 대유둔(大有屯)이라는 국영 농장에 물을 대려고 화성을 쌓는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3개월간 정조가 특별히 지시해서 만들었습니다. 대유둔은 대단히 넓어 10년간 1만 석의 쌀을 생산할 수 있어 저수지 이름을 만석거라고 붙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만석거에는 선진적인 수리 시설인 수문(水門), 수갑(水閘), 수차(水車)를 설치해 효율적으로 물을 관리했어요.

▲ 축만제(서호) 표석. /동원고 제공
▲ 축만제(서호) 표석. /동원고 제공
그리고 팔달산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호수 축만제는 ‘오래도록 축복받을 호수’라는 뜻으로, 지금은 ‘서호’라고 많이 불립니다. 그 이유는 화성의 서쪽에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 항저우(杭州)라는 도시에 있는 ‘서호(西湖, 시후)’만큼 아름답고 넓은 호수라는 의미였습니다.

나름 당시에는 우리도 중국에 못지않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서호의 남쪽으로 물이 빠지는 둑에는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주변 경치와 어울리게 했는데, 항미정은 ‘항저우의 눈썹’이라는 의미로 꽃이 활짝 필 때에는 경치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서호의 물로는 서둔(西屯)이라는 국영 농장이 운영됐습니다.

실용적인 기술을 활용해 화성을 쌓은 실학 정신을 농업 기술에 활용해 국가 발전을 도모하는 실학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 수원의 만석거, 축만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200여 년 전의 신도시 수원에 저수지를 만들고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농업 경영을 하다 보니, 근대에도 수원은 우리나라 최신 근대식 농업기술의 중심지가 됩니다. 1906년 ‘권업모범장’이라는 농업시험장이 설치되고 권농정책을 이끌던 농촌진흥청이 이곳에 들어서 새로운 농업기술을 개발, 보급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권업모범장 표지석이나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육종학의 큰 인물 우장춘 박사의 무덤, 그리고 농업과학관이 자리하고 있어요. 서호 옆의 농업과학관에 가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답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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