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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21] 원효와 화성 백곡리 고분군

경인일보 발행일 2015-11-24 제17면

원효대사 해골물 일화 담긴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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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백곡리 고분군의 석실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공

원효·의상 당 유학 예상코스 짐작
신라 ‘횡혈식 석실분’ 가능성 높아
당성일대 발굴조사 화성명물 기대


원효(元曉)대사는 도반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에 불법을 구하고자 길을 떠났다. 본국 신라의 해문(海門)인 당주(唐州, 사적 제217호 화성 당성)에 도착해 당나라로 가는 큰 배를 구해 서해를 건너려 했다. 하지만 심한 폭우를 만나 길 옆 토굴에 몸을 숨겨 비바람을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궂은 비는 계속 내리고 땅은 질퍽해서 도저히 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무덤 속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어지자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대사는 탄식하며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편히 잤는데 오늘은 귀신굴에 의탁함에 근심이 많구나. 이제야 알겠도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 것을. 또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소”라고 말하고는 바랑을 메고 경주로 돌아갔다.



이상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 ‘신라국의상전’에 실려 있는 유명한 일화다.

원효 사상의 중핵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상을 깨달은 역사의 현장은 과연 어느 곳일까? 현재까지의 역사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를 종합할 때,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자리한 백곡리 고분군 일대를 단연 1순위로 꼽을 수 있다.

백곡리 고분군은 신라 대당 교역의 창구였던 신라의 당성(唐城)과 바로 인접해 있는 당시 신라인들의 공동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백곡리고분군은 단 6기만 발굴돼 학계에 보고돼 있다. 아쉽게도 현재까지는 4~5세기 무렵 백제고분만이 발굴됐다. 그러나 신라산성 옆에는 반드시 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다는 신라고고학의 정설에 따르자면, 백곡리고분군에 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고 그곳을 발굴한다면 신라고분이 발굴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당시 신라의 무덤 양식은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조성한 이른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유행했던 사실로 미루어, 동일 형식의 무덤이 조사될 것이라 예상한다.

어쨌든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가고자 한다면, 신라의 해구(海口)였던 지금의 당성에서 출발해야 했고, 그들이 비바람을 피해 무덤에 들어갔다면 당시 백곡리에 자리했던 신라의 ‘횡혈식석실분’이었음은 가장 설득력 있는 상상이다.

역사는 현장감을 지녀야 그 가치가 승화된다. 백곡리고분군은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현장일 가능성이 높고, 그를 대표하는 대중불교의 단초가 마련된 곳이 그곳의 ‘횡혈식석실분’일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문화유산은 역사적 일화와 고고학적 사실이 손을 잡아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백곡리고분군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고고학적 정보가 더 많이 확보돼, 당성 일대가 원효의 해골물 이야기와 함께 화성의 명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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