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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23] 잠곡 김육과 대동법시행기념비

경인일보 발행일 2015-12-08 제17면

전란으로 피폐된 조선후기 ‘개혁’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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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소사동에 위치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40호 ‘대동법시행기념비’. /경기문화재단 제공

광해군 실정에 가평군서 은거
인조때 관직나가 동전 등 도입
삼남지방에 대동법·균역 시행
평택에 ‘백성위한 혁신’ 공로비


혁고정신(革故鼎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이룬다는 뜻으로 주역의 49번째 택화혁(澤火革)괘와 50번째 화풍정(火風鼎)괘에서 연유한다.

‘혁(革)’은 본래 짐승의 가죽을 가리키는데, 짐승은 봄·가을에 따라 털갈이를 하기 때문에 ‘바뀌다’라는 의미가 파생됐다. ‘정(鼎)’은 솥을 가리킨다. 솥은 밥을 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를 갖게 됐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혁신적인 사회적 변화는 이뤄내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개혁가는 누구일까? 가장 괄목할만한 개혁을 이끈 인물 중 하나가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대 전란으로 피폐된 국가와 국민을 도탄에서 끌어내는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했던 조선 최고의 경세가였다.

김육은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가평군 청덕동에 은거했다. 10여 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고, 개혁을 추진할 실학적 경륜을 쌓았다. 인조시대에 관직에 나아가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하고 수레·수차 및 동전의 도입과 활자의 제작에 진력했다.

김육은 70세에 재상에 올라 충청도의 대동법을 주관했고,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물리치고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던 중 79세로 서세했다.

평택시 소사동에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가 있다.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세워졌다고 한다.

김육이 생애를 걸고 추진했던 대동법과 제반 개혁은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기폭제였다. 특산품과 현물을 세금으로 거두는 대신 그것을 쌀과 베로 거둠으로써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민생과 나라가 살아났다.

오로지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가 간절한 시절이다.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인 김육의 학문, 개혁사상과 실천의지를 오늘날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김육의 사상과 업적을 되새겨 보기 위해 평택 소사동과 남양주 삼패동 유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국내외의 혼란 속에서 진정한 국가 발전의 동인을 생각해 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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