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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택기행·15]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 빌딩)

김성호 김성호 기자 발행일 2016-04-14 제9면

무역항으로의 눈부신 발전… 인천항 역사의 또다른 중심
{ 닛센해운 빌딩 : 1932년 이전 건축 추정… 강점기 해운회사 사무실로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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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중앙동 4가 2-26에 있는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은 일본 강점기 번성했던 인천항 주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인천의 향토 하역사인 선광이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을 위해 만든 선광문화재단의 사무실과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1925년 세워진 해운회사 건물로 수년 후 사옥 확충때 신축된듯
장식주의·모더니즘 결합 1930년대 '4층 근대건축물' 현존 유일
1918년 축항 완공으로 우편국 등 주요 건물들 들어선 새 중심지
향토기업 선광이 인수… 1층에 미술관 만들어 개방 '가치' 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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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개항 이전까지 인천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비록 강제된 개항이었지만 항구가 열리자 이곳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들어왔고, 항구 주변으로는 돈과 사람이 몰리며 인천도 근대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인천 중구 중앙동 4가 2-26에 있는 선광미술관(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은 일제시기의 번성했던 인천항 주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인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4층 구조의 근대건축물로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고층 구조의 건축물이라는 가치도 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해운회사의 사무실로 쓰였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1년판)에는 닛센해운(日鮮海運(株))은 해륙 운송업, 중개업, 대리업과 그에 부대한 일체의 사업을 벌이는 업체로 1925년 10월 16일 지금의 주소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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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이용하지 않고 있는 건물 주 출입구. 가장자리에 설치된 장식이 특이하다.

회사 설립 당시에는 현재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으며, 각종 사진과 자료 등을 봤을 때 수년 후 사옥을 확충하면서 새롭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늦어도 1932년 10월 이전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조선신문사가 발간한 책 '인천의 긴요문제'에는 현재 건축물의 사진이 그대로 수록돼 있다. 이 책이 발행된 시점은 1932년 10월로 인쇄도 같은 달 이뤄졌다.

하지만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의 항공 사진을 보면 지금 건물이 있던 자리에 모양이 다른 일본식 3층 건물이 확인된다. 이 항공사진에선 인천부청(현 인천 중구청 자리로, 일제시기의 인천시청) 자리에 일본 인천영사관 건물 모습이 보인다.

기록을 보면 인천부청 신청사는 인천영사관을 허문 자리에 1932년 8월 19일 착공했다. 때문에 이 사진은 그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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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6월 건물 1층 전체를 갤러리로 꾸며 지역 작가들의 전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이다. 튼튼해 보이는 1층 위에 나머지 2~4층이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은 형태다.

1층의 외벽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벽돌로 마감됐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굵은 띠를 둘러 층을 구분했다. 요즘 짓는 고층 아파트 건물이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저층에 띠를 두르거나 짙은 색으로 마감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보면 된다.

2·3층은 같은 모양으로 이어지다 4층에서는 모양이 달라진다. 4층 각각의 모서리 부분을 잘라낸 듯한 모양으로 위에서 보면 십(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빛이 잘 들게 하고 빗물 유입을 막는 공간인 '드라이 에어리어'가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벽으로 덮여 있다. 건물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상태로 변했다.

현재 건물 1층은 신축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2~4층의 외벽을 마감하고 있는 타일은 언제 마감된 것인지 정확지 않다. 장식주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결합한 1930년대 초기 사무소 건축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4층 근대건축물이다.

인천의 긴요문제
1932년 조선신문사가 발간한 책 '인천의 긴요문제'에 수록된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 /출처=인천의 긴요문제

민간이 세운 4층 규모의 근대건축물은 보기 드물다. 민간회사의 사무실 건물을 높이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땅의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근대 건축물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철근과 콘크리트 등 당시 건축 자재는 지금보다 상당히 비싼 재료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수평으로 확장하지 않고, 수직으로 높이 지었다는 것은 당시 지가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그 일대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리가 당시 경제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인천의 긴요문제'는 이 일대를 '인천의 현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축항(築港) 앞 대로 - 바닷길로 인천에 입항하여 부두에 내리면 전방 좌우에 인천세관, 오사카상선회사 지점,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 지점, 인천우편국 등의 큰 건물이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이 인천의 현관으로서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큰 대로는 이것을 거점으로 서쪽으로 인천역에 이어져 있다. 전면의 르네상스식 근대건축물은 인천우편국이다."

인천항 항공사진(1932)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 수록된 항공사진. 이 사진에서는 지금의 건물이 아닌 일선해운의 옛 건물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인천부사

무역항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통관 기관인 인천세관을 비롯해 서신 교류를 할 수 있는 우편국 등의 시설과 해운회사 사무소 등이 들어서며 항만 경제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인천항이 무역항으로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사건은 물때와 상관없이 배들이 인천항을 드나들 수 있게 갑문식 선거를 갖춘 '축항'의 완공이다. 이 토목공사는 1911년 착공해 1918년 마무리되는 대공사였는데, 선광미술관 일대는 축항 완공 이후 새롭게 형성된 중심지였다.

인천항의 축항 완공 이전까지는 이곳과 1㎞가량 떨어진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근에 항만의 주 출입구가 있어 그 주변이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인천항은 개항 당시는 자연항이었기 때문에 큰 선박은 직접 부두에 배를 붙일 수 없어 작은 배들이 여객이나 화물을 부두로 운송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차츰 방파제와 선박계류시설인 잔교 등을 갖춘다.

1929년 인천부지도
1929년 제작된 인천부관내도. 사진 속 붉은 도로가 사람과 물자 이동이 가장 빈번한 도로로, 닛센해운 빌딩은 도로와 인접해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인천 축항이 건설되며 인천항은 부산항 다음으로 많은 화물을 처리하는 중요 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며 "자연스레 축항건설 이후 항만관련 기관이 옮겨가며 새롭게 중심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건물은 공교롭게도 인천항을 중심으로 성장한 향토기업 선광이 사용해오다 지금은 이 회사가 장학사업 등 사회공헌을 위해 설립한 선광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선광문화재단은 지난 2013년 이 건물의 1층을 미술관으로 꾸며 지역 문화·예술인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했다.

황순형 선광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인천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을 인천에서 성장한 향토기업이 인수해 공익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며 "소중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인 만큼 잘 보존하고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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