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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27] 한국문학에 외설을 허하라

경인일보 발행일 2016-08-03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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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
영국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있다면, 한국에는 '반노'가 있었다. 염재만(1934~1995)의 장편소설 '반노'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성적 표현의 자유를 두고 법과 문학이 충돌한 사례다.

'반노'는 1969년 7월 30일 기소되어 1975년 12월 6일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을 때까지 무려 6년 5개월 동안 외설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지루하고 긴 법정 공방을 거쳤다.

염재만은 충북 음성 출신으로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11~1977)의 제자였다. 그는 수원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에로틱한 장편소설 '반노'를 발표한다.

그러나 작품 발표 직후, 그는 삼선개헌 문제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정국 속에서 음란물 제조 혐의로 전격 기소된다. '반노'는 윤진두와 홍아라는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다투고 화해하고 정사를 반복하는 이야기를 다룬 지루하고 밋밋한 작품이다.



'반노 재판'은 개헌 문제로 정국이 요동치고 국민저항이 집단화할 조짐을 보이자 차제에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주기 위한 극장국가(劇場國家)의 정치 퍼포먼스였다.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다 해도 예술성이 크면 음란성이 상쇄된다는 이교량설(利較量說)과 작품이 다소 선정적이어도 선정성이 작품의 전체 맥락 속에 필요한 요소이거나 작가주의의 자장 속에 놓여 있다면 음란성은 전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승화설(昇華說)을 근거로 내세운 변호인단의 호소 전략이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승리한 자는 명백히 극장국가였다.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에 성적 표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충분한 '감옥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푸코(M. Foucault)의 말대로 '감옥효과'란 감옥에 갇힌 수인들에 대한 통제와 함께 감옥에 갇히지 않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국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간다는 사실을 항시적으로 일깨워주는 권력의 작동방식을 말한다.

'반노 재판' 과정을 거쳐 1975년에 형성된 한국문학의 성적 가이드라인에 대한 도전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친 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1992)와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에 의해 시도된다.

외설과 성-담론을 둘러싼 인간의 천부적 본능과 도덕률 그리고 국가권력 간의 갈등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며, 이 삼자갈등은 담론의 수면 아래 잠복해 있을 뿐 언제든 다시 발화할 가능성이 크다.

'반노'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지사가 됐으나 '반노 재판'은 국민은 물론 작가들 자신이 자기를 감시하게 만드는 원형의 감옥 곧 판옵티콘(panopticon)으로 작동하고 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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