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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1)

정진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17-01-19 제9면

꽃다운 스물부터 몸에 밴 비린내
인천 어시장의 '살아있는 전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임경애 할머니
황해도 순위도에서 태어난 임경애 할머니가 두 번의 피란생활과 평생을 해 온 생선장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4후퇴 이어 휴전협정때 군 철수로 두번째 피난
파라다이스호텔 자리 천막생활때 생선장수 시작
서울까지 전철 타고 대야 들고 다니며 5남매 키워
소매치기·아동유기 많았던 하인천 어물전서 분투
이후 지역 최대 연안부두로 터전 옮겨 장사 이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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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60년 넘게 생선장사만 한 임경애(84) 할머니는 1934년 개띠 해에 황해도 옹진군 순위도에서 태어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당뇨가 심해져 지금은 어시장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쉬고 있다.

할머니는 피란살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첫 번째는 처녀 때 오빠와 함께 둘이서 순위도 근처 비압도를 거쳐 백령도에 잠시 머물다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 배치됐다. 1·4 후퇴 때로 기억한다. 나환자촌인 소록도가 바로 앞이었다. 임 씨 집성촌이었다.

"커다란 기와집이었는데 임 씨 집이었어. 거기서 나는 밥을 해주고, 오빠는 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었지. 그러다 섬이 복구됐다고 해서 고향에 갈 배가 목포까지 왔어."



겨울에 나와서 도양면 임 씨 집에서 모내기까지 해줬다. 순위도 고향에 돌아가서는 억지 결혼을 했다. 신랑이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은 데다 서구적으로 생겨서 친구들이 '네 신랑은 양키'라고 놀려댔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밥을 닷새나 굶었지만 소용없었다. 전선이 또다시 인민군에 밀리게 되자 두 번째 피란을 했다.

이번에는 친정에 시댁 식구들까지 다 나왔다. 부모는 백령도에 남았고, 시누이 등 여섯 명이 인천으로 넘어왔다. 그 피란민들은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천(옛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친 대형 천막 8개에서 생활했다. 열아홉에 결혼해 첫째를 스물에 낳았다.

여기서 잠시 당시 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터지면서 1차 피란을 나왔고, 수복된 뒤 고향에 돌아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란을 한 것으로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하지만 임경애 할머니는 전쟁이 났을 때 바로 피란을 나올 수가 없었다.

연중기획용 인천자료서적
해방 이후 인천항 일대 전경.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순위도에서는 그때 군인이나 경찰들만 피란선을 탈 수가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은 거의 피란을 나오지 못했다. 1·4 후퇴 때 잠시 밀렸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2월 백령도에 상륙했다. 순위도 등 황해도 섬지역의 유격대를 지원하는 게 주 임무였다.

이런 작전으로 다시 순위도가 수복되었다. 이때 전라도에서 고향 땅 순위도로 돌아갔고 결혼을 했다. 우리군은 이후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우리군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백령도와 연평도 이북 지역 섬에서 철수했다. 임경애 할머니의 두 번의 피란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라다이스호텔 자리에서 천막생활을 할 때 체구가 건장했던 남편은 큰 배에서 물건을 내리는 일자리를 얻었다. 할머니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천막생활을 하는 언덕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선창가에 생선장수들이 있었다. 자리 하나를 맡고서는 인천역 뒤에 있던 수산물공판장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팔았다.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맡게 된 비린내를 이렇게까지 팔십이 넘도록 맡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실향민들은 1년 정도 천막생활을 하다가 쫓겨났다. 인천 남구 독쟁이고개로 가야했다.

그 사이 번 돈으로 하꼬방 집을 장만했다. 독쟁이고개에 도로가 뚫리면서는 신기촌 쪽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1975년 하인천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옮기고 나서는 그때 지은 연안부두 아파트에 들어왔다.

임경애 할머니의 생선장수의 삶은 그야말로 분투기이다.

"부지런해야 돈을 벌어. 아이고! 하여튼 장사하면서는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으니까. 어시장은 일요일이고 명절이고 없어. 남들 놀 때 우리는 일 해야 돈을 벌지."

아들 넷을 낳았고 딸을 하나 더 키웠다. 그런 자식 다섯을 파출소 한 번 들락거리지 않게 다들 잘 키워냈다. 어린애를 업고 생선 담은 커다란 고무 대야는 이고 서울까지 오갔다. 마포, 용산, 한남동 주택가를 돌았다. 혼자서는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대야는 몇 겹이나 비닐을 씌워 깨끗하게 한 뒤 전철을 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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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하인천 수협 위판장에서 수산물을 경매하는 모습. 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한 번은 세 살배기를 업고서 "생선 사세요"를 외쳤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안 사요"라고들 했다. 등에 업힌 애가 말을 배울 때다. "생선 사세요"를 하니 업힌 애가 "안 사요"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 하는 말을 따라 한 것이다.

아이를 업고 무거운 생선을 이고 동네를 헛걸음질 하느라 힘이 들어 죽겠는데 이를 알 턱이 없는 아이가 "안 사요"라고 따라 하니 화가 치밀었다. 내려놓고 볼기를 때렸다. 이를 본 동네 할아버지가 영문을 물었다. 사정을 말하니 집으로 불러 물건을 몽땅 사고 밥까지 먹여주었다. 서울 사람들은 할머니를 인천댁이라 불렀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임경애 할머니2

하인천 어시장은 장사도 많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소매치기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쓰리꾼(すり-, 소매치기)이 그렇게 많았어. 한 번은 내가 보고 있는데 손님으로 온 아주머니의 가방을 누가 쓰리하는 거야. 옆의 패거리는 나한테 소리를 지르면 죽인다고 눈짓을 하고. 꼼짝할 수가 있어야지. 하인천 어시장에는 그렇게 사람이 붐볐어."

하인천 어물전에서는 아동 유기 사건도 자주 있었다. 그만큼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키우기 버거우면 사람이 많은 어시장에 애를 버리고 가고는 했다. 아마 장사하는 누군가 데려가면 밥은 굶지 않으려니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연안부두 어시장은 일거에 인천 지역 최대 점포 수를 자랑하는 시장이 되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실린 1957년 기준 시장 현황표를 보면 신포동 소재 어시장 점포 수는 7개다.

그 시절 하인천 어시장 상인들은 점포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인천개항 100년사'에 나오는 1981년 기준 연안부두 인천종합어시장 점포 수는 568개이다. '인천시사 70년대 편'에도 그렇게 나온다. 하인천 어시장 상인 대부분이 연안부두로 이전했는데 그 어물전의 상인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임경애 할머니는 하인천 시절과 최근 연안부두 어시장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하인천 때부터 지금까지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장사하는 이는 2명이 더 있을 뿐이다.

"여든일곱 된 할마이하고 여든넷 된 할마이하고 그렇게만 남은 모양이야. 옛날부터 같이 하던 사람은 이제 다 가고 없어."

할머니가 보기에 옛날과 지금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천 대표 생선인 조기의 크기에 있다. "예전에는 조기가 누렇고 이렇게 팔뚝까지 올만큼 컸어. 그런데 요새는 그 절반도 안 돼."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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