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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2]추리소설의 숨은 걸작

경인일보 발행일 2017-06-14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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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아버지를 죽여라.'

인류의 문명과 법과 예술은 부친살해(patricide)에서 시작됐다. 이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1913)의 대전제요, 라캉의 상징계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운동의 모토였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질서와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후대 문명과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다.

해리 케멜먼(1908~1996)의 '9마일은 너무 멀다'(1947)는 앞선 추리소설의 아버지들을 죽임으로써 다시 고전파 추리소설을 되살려낸 단편 추리소설의 걸작이다. 작가 본인이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대학교수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주인공 닉 웰트가 영문과 교수로 설정돼 있다.

또 '사다리 위의 카메라맨'(1967)에서 보듯 지식인(교수) 사회의 모습을 잘 재현해낼 수 있었다. '랍비 시리즈'(1964~1996)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단숨에 그를 유망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9마일은 멀다'는 착상에서 작품화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9마일은 멀다'는 화자인 검사 '나'와 주인공 닉 웰트의 대화 형식으로 이어지는 추론의 연쇄가 압권이다. 섣부른 추론을 전개하다 난처한 상황을 겪은 내게 닉 웰트는 10마디 안팎의 문장을 제시하면 여기에서 추론을 끌어내보겠노라고 제안한다.

화자는 무심코 "9마일은 멀다. 그리고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는 문장을 제시한다.

그러자 웰트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넌더리를 내고 있다, 비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9마일은 먼 거리가 아니기에 말하는 사람이 운동선수는 아닐 것이다, 그가 걸었던 시간대는 자정에서 오전 5시 사이일 것이다,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전 5시 30분까지 중요한 약속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급수 중인 급행열차 워싱턴 플레이어를 타야 했다, 이어 오늘 발견된 타살된 시체의 사망추정시간으로 미루어 보니 허들리역에서 멈춘 것과 일치한다, 당신의 말은 무심결에 누군가에 들은 말일 것이다, 9마일을 걸었으니 배가 고팠을 것이다, 우리가 방금 전에 나온 카페에 들렀다 마주친 2인조 남성이 범인일 것이라는 엉뚱하지만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 합리적 추론을 끌어내고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기막힌 추론과 용의주도한 논리적 구성으로 인해 '9마일은 멀다'는 단숨에 명작의 반열에 등극한다.

주어진 단 두 개의 문장에서 다양한 논리적 가능성을 끌어내는 날카로운 합리성과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는 경제적 구성 그리고 추론을 뒷받침하는 서사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깔끔한 솜씨는 케멜먼 추리소설의 특장이다.

'9마일은 멀다'는 논리의 아름다움과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나아가 잠자는 뇌세포들을 깨우는 역대급 추리소설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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