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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재벌사·76]현대-8 주베일 항만공사-20세기 최대 역사(役事)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10-02 제14면

무려 9억4천만달러 공사 수주 세계가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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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은 1976년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해 큰 화제가 됐다. 사진은 주베일 산업항 준공 사진. /현대건설 제공

당시 국가예산 25% 달하는 거금
1976년 정식계약 정부 지급보증

1970년대 33개업체 새로 계열화
美경제지 500대기업중 98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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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에 있어 1970년대는 천당에서 나락으로 그리고 다시 기사회생한 고난의 시기였는데, 계기는 1973년 10월부터 1975년 중반에 끝난 제1차 오일쇼크였다.

1973년 10월 6일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감산을 통해 유가를 무려 4배 이상 끌어올려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당시 한국은 아랍국들이 비 우호국으로 분류해 고통이 더 컸다. 1974년 하반기부터 수출부진과 고용감퇴, 경상수지 악화 등 거시경제지표들이 나빠지면서 당시 새로 추진한 정부의 100억달러짜리 중화학 공업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했다.

>> 현대건설, 사우디 진출

정부는 돌파구로 중동의 산유국을 지목했다.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값 인상으로 긁어모은 달러화로 대대적인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1974년 2월 16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제르 기획상과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협력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신호탄으로 이란, 쿠웨이트, 바레인 등과 중동시장 접근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자본은 물론 기술마저 불량한 국내 건설업체들의 핸디캡을 커버하기 위해 해외 건설에 한해 물적 담보 없이도 정부가 대신 지급을 보증하는 내용의 '해외건설촉진법'을 마련해 중동건설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해외 건설 수주액은 1974년의 8천900만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5천100만달러로 급증했다. 1975년 3월에는 신원개발이 이란에서 4천76만 달러의 코탐사 항 확장공사를, 현대는 바레인에서 1억3천700만달러의 ASRY조선소 건설공사를 각각 수주했다.

더욱 경이적인 사건은 현대건설이 1976년에 무려 9억4천만달러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공사기간 1976.6~1979.12)를 수주한 것이다.

워낙 공사규모가 큰 데다 한국 기업이 수주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국제적으로 큰 화젯거리였다. 수주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해외 언론에선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소개했다.

당시 사우디는 경제개발에 착수했으나 항만이 부족해 주베일에 대규모 산업항을 축조했다.

해안으로부터 무려 12㎞ 떨어진 수심 30m의 바다 한가운데에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open sea tanker terminal) 건설사업으로 총 길이가 3.48㎞에 달해 그 모양이 꼭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해상활주로 같은 모양이었다.

정식계약은 1976년 6월 16일에 체결됐는데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섰다.

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효과를 본 돌관경영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공사에 임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 OSTT의 철 구조물을 쪼개 89개의 재킷(jacket)으로 나눈 후 이를 한국의 울산조선소에서 제작 납품토록 했다.

재킷 한 개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웬만한 10층 건물 높이로 재킷 1개의 중량은 400~500t이었다. 문제는 사우디까지 운반하는 것이나 재킷의 덩치가 너무 커 화물선으론 운반이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1만5천800t급과 5천500t급 바지선 두 척을 연결해 그 위에 재킷 4, 5개씩 싣고 예인선으로 끌고 갔다. 3만2천여리를 19차례나 왕복하며 89개의 재킷 운반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는데 운반에만 총 35일이 소요됐다. 이 공사에만 총 25만명이 동원됐다.

그러나 1977년 3월과 1979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공사 현장에서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환경 시정 등을 요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열악한 근로조건을 못 견딘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몰고 와서 사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 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폭동이라며 진압을 요청했고 사우디 정부는 즉각 방위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 그룹 최대 확장기


1970년대는 현대그룹 역사상 최대의 확장기로 평가된다. 이 기간 중 현대그룹은 총 33개 업체를 새로 계열화했다. 건설 및 자동차, 조선, 중장비 등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직계열화가 특징이다.

현대그룹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1978년에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다.

현대건설은 1960~1970년대 정부주도의 압축성장 시대를 맞아 건설에서 중공업으로, 하찮은 못에서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수직계열화작업을 통해 국내 정상의 건설기계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정부가 기획하고 연출한 '주식회사 한국' 드라마에 현대는 주연배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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