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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철도부설 사업 직접 뒷받침" 배경·역사 재정립은 과제

김민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2-14 제3면

1888년 朝美협상 의미와 과제

단서조항 등 구체적 제안 오고가
美 지나친 특혜 요구 '부정적 영향'
1897년 모스 부설권 日에 넘어가
전문가 "고종, 외교적 관점서 추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된 조선-미국 간 철도 부설 협상 내용은 우리나라 철도 도입 과정의 역사를 앞당겼다.

근대화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철도 부설을 조선이 자주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도 새로이 확인되면서 우리 철도 역사 연구에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미국공사왕복수록'에 실린 철도약장 초안을 보면 1888년 미국 관료와 사업가는 철로, 가스등, 양수기 등 3건의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조선에 제안했다.



초안에는 10월 10일이라는 날짜만 나와 있으나 이상재 선생이 미국에 머문 시기를 따져봤을 때 1888년이 확실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인천우체국의 초대 우체국장이기도 하다.

특히, 철도의 경우 "조선 경성 제물포 사이에 설치하고 개설 도로와 역사 건축 부지의 토지는 특별히 면세해달라"는 구체적인 협상안까지 제시한다.

이를 조선 정부가 승인하면 9개월 안에 시공하고, 그 기간 안에 착수하지 못하면 계약은 자동 파기된다는 단서조항까지 달았다. 미국 측은 조선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조선기계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철도 사업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미국의 지나친 특혜 요구 때문이었다. 이들은 토지에 대한 면세뿐 아니라 15년 동안 기계 수입에 대한 관세까지 면해달라고 요구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이런 이유 때문에 고종에게 사업을 부정적으로 보고 했다.

이 협상은 비록 무산됐지만, 고종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공사관을 통해 조선 내 철도 유치를 직접 추진했다는 점은 우리 철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철도 부설권을 호시탐탐 노렸고, 결국 1897년 미국인 사업가 모스로부터 부설권을 사들였다.

1937년 일제는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 구간 개통일(1899년 9월 18일)을 '철도기념일'로 삼았고, 1964년 11월 우리 정부가 이날을 '철도의 날'로 이어받아 지난해 대한제국 철도국 창설일(6월 28일)로 바뀌기까지 사용해왔다.

이처럼 철도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이 공식 외교 라인을 통해 자주적으로 철도 유치를 직접 추진해왔고, 구체적인 검토까지 했다는 점은 이런 식민지 근대화론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은 "조선시대 외교 자료는 굉장히 귀한데 철도 역사를 앞당길 수 있는 자료까지 확인되면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며 "이 문서는 조선이 근대화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철도 부설을 직접 추진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했다.

이번 문서 발견을 계기로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재정립과 추가 연구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1897년 미국인 사업가 모스가 했다는 경인철도 기공식 장소는 오늘날 인천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장소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 고종이 미국 측과 철도 협상을 하게 된 과정, 관련 문서가 미국에 남아 있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학계에서도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출발점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연구자인 동국대 한창호 역사교육과 교수는 "고종은 철도 부설을 통해 미국이 조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외교적 관점에서 사업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박정양이 만류했다"며 "1888년 조미 철도 협상의 구체적 배경과 조선기계주식회사 설립 추진의 실체, 철도 역사 재정립 등 앞으로 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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