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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스토리]3·1운동·임정수립 100주년 기획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만나다'

정의종 발행일 2019-04-19 제13면

돌아오지 못했지만 늘 우리와 함께해 온 '안중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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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기념관엔 사살 현장 재현 동상과 사진·서예작품 등 기록물 '빼곡'
이토 죄목 당당히 열거한 재판… 해외 언론들 "승리자는 안중근"
최봉룡 다롄대 교수 "지금은 유해 발굴에 일본이 협조할때"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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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을 헤매는 영혼이 평화를 재촉한다. '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한국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그의 유해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고국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의거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살신성인'과 '평화' 정신은 한 민족과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순국 109년인 올해에는 그의 선구자적 사상으로 결실을 보게 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남북문제와 한·중·일의 긴장관계가 짙어지는 지금, 우린 '안중근 평화' 사상을 어떻게 승화시켜야 할 것인가.

한국 독립운동사의 뿌리인 '안중근'의 흔적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경인일보가 찾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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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뤼순감옥(왼쪽)과 사형대.

# 안중근의 도시 하얼빈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현 자오린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 다오."

안중근의 거사 지역으로 기억되는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역에 마련된 '안중근 기념관'에 들어서니 안 의사의 유언 중 한 대목이 기자의 눈에 쏙 들어왔다.

지난달 30일 중국 정부가 새로이 개관한 이 기념관에는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안 의사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라도 하듯, 그에 대한 사진과 기록물, 서예작품이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안 의사의 전신 동상이 보였다. 그 위에 보이는 시계는 거사 시각인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삶이 멈춘 그 시간, 향년 31세였다.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벅찬 가슴으로 한 발씩 내딛는 기자의 발걸음을 다시 멈추게 한 곳은 거사 포인트가 바로 보이는 사살 현장.

현재도 열차 이용객이 사용하는 이 공간은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이라고 한다. 전시관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안 의사가 서 있던 장소는 삼각형, 이토가 총에 맞았던 곳은 마름모 모양으로 2개의 표시점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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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역.

예닐곱 발걸음 정도 될까. 이토의 방문을 환영하는 일본인으로 변신한 안 의사는 이곳에서 민족의 한을 품고 이토에게 총 세 발을 쏘았다. 총 7발 중 나머지 네 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도 등이 맞았다.

하얼빈역은 러시아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러시아 병사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 의사는 체포되면서도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그 사이 이토는 치명상을 입고 20분 만에 사망했다. 이토를 격살한 소식은 사흘 뒤인 29일부터 세계의 매체들에 의해 타전됐다.

22일 미리 하얼빈에 도착한 안 의사는 거사 장소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조린 공원(현 자오린공원)'에서 마지막 작전회의를 하고 최종 전략을 세우는 치밀함을 보였다.

안 의사와 우덕순 유동하 등 3인이 거사 전 마지막 기념촬영을 한 곳이다.

공원 한 켠에는 안 의사가 사형 선고 이후에 마지막으로 남긴 서예 작품 '청초당(靑草塘)'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이 외로이 서 있다.

마치 안 의사의 시신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얼빈 외곽에는 일본의 비이성적 승전의 욕망이 드러난 인체실험 및 생화학무기 실험장인 731부대의 자취도 남아 있었다.

일본은 '광기의 현장'을 숨기고 싶었는지 폐망 이후 폭파하고 태우고 없앤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자오린공원(조린공원)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 자오린공원(조린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서예글씨 청초당이 새겨진 돌.

# 세계는 안 의사를 승리자로 타전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된 의로운 투쟁 재판. 안 의사는 일본의 강행 속에 6번의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 언론은 그를 진정한 승리자로 보도했다.

이토 사살 나흘만인 30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넘겨진 안 의사는 지하 심문실에서 미조부치 검사가 제기한 100여개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하고, 명성황후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동양평화를 깬 죄 등 오히려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열거하는 당당함을 보였다.

사살 7일 만에 여순감옥에 압송된 그는 독방에 감금돼 10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그를 변호하겠다는 영국, 러시아의 무료 변호 신청이 쇄도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300명의 방청객과 더불어 전 세계 언론도 외로운 투쟁 재판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며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은 2월 14일 6차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일본의 부당한 재판을 간파한 안 의사는 오히려 심판관에게 "일본에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은 없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안중근 재판
중국 다롄 뤼순(여순) 관동법원에서 재판 받는 안중근 의사(앞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사형판결을 받고 사흘 뒤 안 의사는 여순고등법원장인 히라이시와 담화를 하고 항소를 포기했다.

그는 담화에서 "나를 보통 살인범으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전쟁포로로서 응당히 국제공약에 따라 처리를 받아야지 여순지방법원의 판결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결심하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도 사형 선고 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장남의 죽음을 앞두고 "너의 죽음은 너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어 3월 26일 오전 10시, 훗날 임시정부 수립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만든 흰색 수의를 입고 그는 의연히 교수형 대에 올랐다.

안중근 기념관
중국 정부가 지난달 30일 새롭게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역에 마련된 이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진과 기록물, 서예작품 등이 진열돼 있다.

#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유해

"청일전쟁 후 중국, 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할 때부터이다."

주은래(周恩來) 초대 중국 총리가 한 말이다. 그러나 안 의사는 한·중 독립의 선구자로 추앙받았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에 묻히지 못했다. 

 

어머니와 두 형제, 부인의 유해 역시 흔적도 없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그가 뿌린 씨앗이 조선의 독립으로 이어져 100년이 되었지만, 그의 육신은 없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올해는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최봉룡 다롄대학 동북사연구중심 교수는 중국을 방문한 한국기자협회 회원사 기자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며 "시신 발굴을 위해 이제 일본이 협조할 때"라고 역설했다. 

 

일본의 역할론을 제기한 그는 "일본의 자료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며, 과거 북한이 지난 1979년과 1998년 2차례 조사에서 실패한 점을 예로 들었다.

역사적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일본 정부가 그 유해를 임의로 매장하거나 처분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된단다. 

 

다만 그 기억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은 반성하고, 피해자는 포용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우리 정치권에서도 안 의사의 시신 찾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러 가지 대안이 나오고 있지만, 내년 순국 110주년엔 더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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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얼빈 금곡호텔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자단 연수'에서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안중근 일가'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시신 못 찾으면 해주 생가복원 '대안'
경기도 추진 한강하구 개발연계 호재"

# 남북관계 전문가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제안


'항일독립운동의 뿌리인 안중근 의사의 시신 찾기는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면 황해도 해주에 있는 그의 생가를 복원하자.'

남북관계 전문가인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지난 8일 중국 하얼빈시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국기자협회가 공동기획한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자단 연수'에서 "시신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이런 제안은 70~80년대 북한 유해 발굴 조사에 이어 2008년 우리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신 찾기는 잊을만하면 나오는 문제"라면서 "가장 많이 조사한 북한에서도 사실상 어렵게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많은 사람의 얘기를 들었고, 간접적으로 현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의 입을 통해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들은 바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그는 "작년에 해주에 있는 안 의사 생가와 청계 성당을 복원해 기념관과 기념공원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함세웅)와 북쪽 조선종교인협의회(회장·강지영) 관계자들이 만나 올해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위해 추진하려 했던 사업이란다. 

 

유해 발굴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그의 생가를 복원해 추모하자는 구상이다.

그는 이를 위해 최근 경기도에서 추진한 남북의 한강하구 개발과 생가복원 사업을 연계하면 좋은 호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소장은 "한강 하구 개발사업은 마주 보는 남북의 지역 간 공동개발하는 사업인데, 해주와 거리가 가까워 배후 관광지로 '안중근생가'를 복원해 남북이 왕래하면 남북 평화 분위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하얼빈/정의종 서울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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