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
엄마와 언니가 물에 들어가면 나도 숨을 멈추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볼 작정이었다. 내 얼굴이 벌게지는 동안 바다는 별의별 빛깔의 자태로 갯가를 보아 넘겼다. 검다가도 푸른, 잿빛이다 은빛이 되는, 누렇다가도 금실처럼 너울거리는 바다가 이물스러웠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숨을 토하면 둘은 아직도 물속이었다. 붉은 깃발이 꽂힌 엄마의 테왁과 큼직한 꽃이 수놓인 언니의 테왁이 물결에 넘놀았다.
엄마가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언니가 감감하던 날이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온화하기만 했다. 숨 참기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대는데 오늘 참 맨도롱하다(따스하다) 싶었다. 네 언니 못 봤냐고 엄마가 고함칠 때까지 그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중군으로 밀려난 까닭만이 확연했다.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도 엄마는 기어이 물질에 나섰다.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게 꺼림칙했다. 껌으로 귀를 막고 허리엔 납덩이를 찬 어멍을 바다가 끝 모를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죽 좀 더 자시란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문어가 바다의 인삼 격인 전복을 먹는 놈이니 오죽 맛이 좋냐 하면서도 물질 전후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많이 넘기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양쪽 어깨를 번갈아 두들겼다. 물에 못 들어가서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안마해 주려 손을 올리자 이내 간지럽다고 뿌리쳤다.
"나신디는(나한테는) 바당이 최고여."
입에 배어 굳은 말을 하며 엄마가 일어섰다.
"아멩(암만) 잘 아는 사람이라도 조심허여. 경헌(그런)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허는 법이여."
엄마에겐 부모도, 서방도 해주지 못한 걸 내주는 바다보다 간이나 보고 내빼기나 하는 사람들이 훨씬 께름칙한 존재였다.
엄마의 낡은 아반떼를 몰고 나섰다. 세화에 들를 생각이었다. 제주 바다는 넓고 사람마다 꼽는 해수욕장도 제각각이지만 내겐 세화리 바다가 각별했다. 울적하면 그려보는 곳, 실은 울고 앉아 있기 싫을 때 더 찾게 되는 곳이었다. 비자림과 멀지 않아 들렀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늦더라도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실종 사건 이후 어수선해진 탓에 인사가 늦고 말았다. 라디오를 틀자 어김없이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종적을 감췄던 여자아이가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귀를 곤두세우는데 은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분위기 뒤숭숭하지? 인터넷에 아이 찾았다는 기사 떴더라."
"엄마는 아직 못 찾았나 봐. 아이랑 같이 바닷가로 갔다던데…."
어디냐고 물어보니 선배는 우리가 이미 아는 곳이라며 곧 비자림으로 건너갈 거라고 했다.
"저녁에 다금바리 먹으러 갈까? 진짜 제주산 쓰는 집으로."
특산물이긴 하지만 워낙 고가여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취직 턱을 내겠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모교 교직원 채용에 합격한 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모습이 순진하면서도 속없어 보였다. 학술 심포지엄 때문에 왔다면서 관광할 시간이 나는지도 의문이었다. 갈치 맛있는 집을 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차창을 조금 열었다. 휘이이, 휘이. 숨비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창틈을 넘나들었다. 밖으로 보이는 해면의 한 지점이 칼치 등처럼 번뜩였다. 소라 잡지 맙서예, 바당에 저축허게마씸. 어촌계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방호벽 위에 나부꼈다. 꼭 화난 사람들처럼 '육짓것'이라고 내뱉는 삼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배와 나는 역사교육과에서도 같은 학회였다. 술 마시며 난상토론할 일이 잦았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생 같은 거시적인 화두부터 국사교과서의 표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티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를 갖춘 선배는 보통 남자들이 지닌 괄괄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여성항일운동에 대해 말할 때도 누구보다 섬세한 입장이었다. 최초이고, 최대였어. 1차 시위 때 삼백 명, 2차 시위 때 천여 명이 호미 들고 빗창 세워 막아서니까 일본인 제주도사가 줄행랑을 쳤대. 그러고 나서 잡혀간 사람들은 몸이 비틀리는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시위 전에 모여 섰던 해녀들의 뒷모습 사진을 봤었어. 등에 아이가 업혀 있고 양식 보따리가 걸려 있는데, 그건 어떤 투사의 앞모습보다 결기가 넘쳤어. 섬에서 초중고를 나온 내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알게 된 건 은수 선배 덕분이었다.
그가 일러준 자료들이 있었지만 바로 찾아보지 않았다. 과제 때문이든 학회 때문이든 향토사를 접할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성운동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허가 없이 육지로 드나들 수 없었고 육지 사람과 혼인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엄마가 육지 사람, 도시 사람을 만나라고 성화를 부릴 정도가 됐으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현무암 몰골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꺼멓게 굳어버린 난항의 궤적. 공부가 곧 그것을 헤집고 흉터마저 들추는 행위 같았다. 항파두리의 삼별초부터 이재수의 난을 거쳐 48년 4월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되짚고 있으면 직접 겪어오지 않았음에도 돌아가고 돌아가 검은 돌에 꼬라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2005년 제주는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나는 유의미하면서도 손쉬운 선포라고 느꼈다. '평화의 섬'은 너무 점잖은 말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국적인 풍경인 양 바라보기나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도 닮아 있었다. 평화는 무슨 무슨 연구를 하고 센터를 세우고 포럼을 연다고 해서 사람들의 내면에 차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다친 곳이 돌에 눌리다시피 하며 장아찌처럼 절여지고 곰삭혀진 기억들이 있는데 바다가 가로막는 것인지, 바람이 발목 잡는 것인지 짱돌들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돌 치우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 균형 잡힌 안목을 길러내기 위해 적당히 알맞춤하게 안내하는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잘해야 하는데. 언니 만날 때 나 이만큼 살았어 할 정도로는 해봐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완전히 떠나길 바랐다. 담임이 권유한 대로 서울 소재 대학에 가라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나긋나긋한 서울 사람과 결혼해 살라고 했다. 여긴 들락날락 안 해도 되컨게. 명절이고 자시고 비행기 탕(타고) 오멍(오느라) 돈지랄 할 거 없다. 나 역시 기왕 가는 거 촌사람 태를 벗어던지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올 필요 없다는 말은 좀 서운했다. 여기 안 오면 어딜 가. 요즘 저가 항공도 많은데 뭘. 엄마는 테왁 천에 난 구멍을 기우느라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하루아침에 서울 사람 되커냐. 허기사 이 어멍 똘(딸)인디 무신건들 못 하겠냐만 여기서 놀멍 지낸 세월만큼 거기서 사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안으커냐. 이제 느 수발들기도 힘들고. 남은 인생 물질이나 허멍 살고 싶어.
세화 바다는 엄마의 태도만큼이나 무심하게 움직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비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조차 스산했다. 가까운 세화오일장터의 휑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1931년 그곳에 해녀들이 운집했던 걸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해 장이 서던 날 해녀들은 사력을 다했었다. 근수 속이지 말라고, 조합비 매기지 말라고,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까지 해먹지 말라고, 일본인 상인은 빠지라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죽고 말 거라고 외쳤었다. 어릴 적 언니와 내가 엄마를 쫓아 구경 다니던 그 장터에서였다.
뭘 모르던 우리였다. 매일이 아니라 5일에 한 번이어서, 그나마도 엄마가 나서야 따라갈 수 있어서 설레기만 한 나들이였다. 장터에 이르자마자 몽생이(망아지)들처럼 뛰어다녔다. 청과전 앞에서 제일 빨간 사과 고르기 시합을 했다. 리어카에 쌓인 가요 테이프를 살피며 아는 가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의류전에 걸린 옷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지만 어쩌다 원피스 한 장이라도 건질 때면 냄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돌아가기 전에 하는 외식이었다. 메뉴는 항상 멸치국수와 오징어튀김이었다. 이름 있는 날만 고기국수와 돔베고기를 시켰다. 식당의 어느 자리에 앉아도 옥빛 바다가 마주 보였다.
엄마는 먹을 때 말이 없었다. 언니와 나도 비슷했다. 오직 국수 빨아올리는 소리와 튀김 씹는 소리만이 우리의 탁자를 들두드렸다. 너무 곱닥헌(예쁜) 바당을 보면 뛰어들고 싶어. 언니가 먹는 와중에 했던 몇 마디 중 한 구절이었다. 그 말 사이사이로 국수 가락이 떨어져 내렸다. 오징어튀김이 한 개 남으면 뒤늦게 시끄러워졌다. 나는 작고 어린 내가 더 먹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언니는 언니대로 물질 배우느라 지친 자신이 임자라고 우겼다. 그제야 엄마가 혀를 차면서 반 갈라 먹어 치우라고 목청을 높였다. 느네 둘 다 안 먹젠 허믄 어멍이 먹으켜!
→ 12면에 계속([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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