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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1·끝)]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下)

신지영
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입력 2023-11-27 20:15 수정 2024-02-06 15:40

'역사의 흔적 있어… 기억이 안 난다'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유산들… 폐허로나마 남아줘 가슴에 간직


파주 장파리에 있던 미군 클럽 럭키바
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

경기도 내 건조물들 열악한 환경 방치
불에 그을리고 흉물 상태로 멸실 위기

아름답지 않아 잊고 싶은 상처라 해도
우리가 기억 안하면 영영 사라질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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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유산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찾아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만들어져 근처의 DMZ홀, 라스트찬스와 함께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지만, 무관심 속에 사라진 날짜도 특정할 수 없게 어느 사이엔가 허물어진 것이다.



럭키바, DMZ홀, 라스트찬스는 파주 장파리 미군 클럽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다. 1960년대 서울 번화가보다 번영했다는 장파리는 미군에 기대어 성장한 당시 미군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장소다.

사라짐은 비단 럭키바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50~70년 가량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도 곳곳의 건조물들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혔고 지금도 열악한 보존 상태 속에 멸실 위기를 맞았다.

이런 상황은 전쟁 문화유산이 대체로 북한과 가까운 접경 지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정과 맞닿아 있다. 피난민의 안식처인 '파주 장곡리 움집', 옛 미군거리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이 모두 그렇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파주 '장곡리 움집' 마을.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미군 원조품과 주변 나무를 이용해 140채를 지었다. 지금은 6채 가량만 남아 있는 상태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1950년대에 움집이라니.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가 아니라 피난민들이 전쟁 물자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마을이 아직 파주 접경 지역 장곡리에 자리 잡고 있다. 2020년대에 이르러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산다. 6채 가옥은 50년대 당시 피난 시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다.

동두천 샬롬하우스는 2019년 화재 이후 방치돼 있지만 건물 외관은 온전하다. 화마가 할퀸 실내는 불에 그을린 채로 말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고아와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아이를 돌봐주던 선교관이자 영어교육기관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폐건물일 뿐이다.

캠프 스탠리 병력이 평택으로 이주하며 쇠락한 '뺏벌마을'에는 한 번 발을 담그면 뺄 수 없어 '뺏벌'이라는 명칭 유래처럼 몇몇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미군 철수 전까지 명동 저리가라할 정도로 번화했다는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으로 남기려는 작업을 펼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미군 캠프 스탠리 후문에 조성된 뺏벌마을은 1960년대 형성된 기지촌이다. 2000년 들어 미군 감축·이주로 쇠락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북부 접경 지역의 전쟁 문화 유산과는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 속 유산은 지금도 삶 가운데 있다. 폐허 속에 쌓아올린 오산감리교회, 이천양정교회가 그렇고 쿠니사격장과 매향교회, 교인이 힘 모아 세운 수원교회 본당이 그렇다.

1900년대 세워진 오산감리교회는 초가에서 적벽돌 건물로, 또 다시 돌벽돌 건물로 변화를 거듭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초가에서 모인 교인들은 손수 적벽돌 건물을 지었고, 인민군 본부로 쓰인 적벽돌 건물이 폭격으로 사라진 뒤엔 돌예배당으로 탈바꿈시켰다.

현재는 오산 오색시장 한 가운데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불탄 들판 위에 파란 풀이 돋아나듯 일제 강점기와 전쟁 화마가 할퀴고 간 도심지에 교회를 중심으로 음식 팔고 물건 나르는 장이 선 것이다.

양정교회는 이천의 전통 있는 사학 양정학원 안에 있다. 이천양정여자초급중학교는 극빈 아동 교육 목적으로 1943년 개설됐다. 전쟁 미망인의 자녀를 가르치고자 신애모자원을 설립했고 그걸 기원으로 학교가 아직까지 이어진다.

양정교회는 1956년 개교 10주년을 맞아 학교 강당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예배당으로 쓰인다. 요즘도 간혹 중학교 강당으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극빈층과 여성의 교육을 위해 지어진 학교가 다시 예배당으로 변하고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참상을 극복하기 위한 민초의 노력을 웅변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동두천 생연동 샬롬하우스는 선교 목적으로 세워져 미군이 인근 주민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으로 쓰였다. 1969년 세워져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나 지난 2019년 화재 이후 복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상태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쿠니사격장의 포성이 멎은 건 2005년의 일이다. 1951년 미군이 매향리 해상 농섬을 포격장으로 만들고 사격 연습을 시작한데서 유래한 쿠니사격장은 매향리 평화공원이 됐다. 사격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첨탑을 만들지 않은 매향교회는 예술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바뀌었다. 매향리 평화공원 옆에서는 유소년들이 야구를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김포 애기봉은 경기도에서 가장 유명한 안보 관광지일 것이다. 동명의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JSA는 영화 뿐 아니라 판문점 도끼만행, 문재인 정부 시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행으로 유명하다. 북한 현역 군인이 총상을 입으면서도 한국으로 넘어온 장소이기도 하다.

애기봉의 이야기는 애달프다. 조선 인조 때 기생 애기가 평양감사를 그리워하며 숨졌다는 장소 애기봉은 이산가족의 한을 상징한다. 2018년부터 현재까지 중단된 이산가족 상봉과 노래 가사로만 남은 '통일'로 애기봉의 한은 현재 진행형이다.

캠프 하우즈 내부
캠프 하우즈 내부 모습.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경기도 곳곳의 전쟁 문화 유산은 전쟁을 극복하려는 민초의 시도, 전쟁 이후 주둔한 미군의 흔적, 전쟁이 남긴 상처의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 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삶을 이어가려 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군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의탁해 살았고 상처도 영광도 남았으나 이제 그런 흔적들은 모두 과거형이 되었다. 잊고 싶은 기억처럼 미군의 흔적을 외면하고 있으니.

이산가족의 상처는 여전하다. 어느새 분단은 80년을 향해가고 이제 곧 북한 땅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경기도 미등록 문화재는 모두 전쟁과 관련 있다. 조선 이후 일제 강점기와 현대사 사이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봤으나 외면해 왔던 장면이 전쟁 문화 유산, 즉 미등록 전쟁 문화재에 새겨져 있다.

미등록 전쟁 문화재가 전해주는 장면은 찬란한 산업화, 눈부신 민주화의 성취도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고자 버텨왔던 민초의 기록이다. 미군 부대 앞의 유흥과 쾌락을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런 모습 역시 우리내 삶의 일부인 것을.

아름답든 추하든 우리가 걸어온 과거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데서 전쟁 미등록 문화재가 간직한 역사는 시작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된다. 전쟁 문화 유산 기획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했다. 기억되길 소망한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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