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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잊힌 인물들' 삶·사상 생생하게

입력 2023-12-18 19:06

[2023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1)] 김경은 소설가 - 안재성 장편소설 '명시'


국내 들어와 거주한 제물포 묘사
성냥·양조공장 따라 노동자 마을
日 자본가·제국주의 동시에 맞선
파업… 1930년대 노동운동사 한획
해방후 귀국 체포돼 유치장서 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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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표지
명시. 안재성 지음. 미디어창비 펴냄. 344쪽. 2019년 12월 22일 출간
김명시는 3·1운동 때 마산포시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참여했다가 제국주의와 싸우기로 결심한다. 주민들은 신(新) 마산에 들어온 조심성 많은 일본인들과 처음에는 거부감 없이 어울렸으나 만세운동을 계기로 제국주의의 얼굴을 보면서 달라진다.

이때 명시네는 온 가족이 운동에 가담했고 누구보다 앞장섰던 엄마가 큰 고초를 당했으며 두 오빠와 김명시의 항일 활동은 이때가 시작이었다. 기마 경찰의 잔혹한 진압 장면을 목격한 열세 살 명시는 달아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후 김명시는 평생 한길만을 걸었다. 1925년 4월17일 극비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큰오빠 김형선과 나란히 가입했으며 그해 겨울,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선발돼 유학을 떠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초기 동력으로 주위 국가들의 반제국주의 활동 세력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과정을 마친 김명시는 중국 상하이로 파견돼 독립운동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국내로 들어왔다가 중국 연안으로, 태항산으로, 다시 연안으로, 해방을 맞아 돌아오기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국내에 들어온 김명시가 제물포에 거주한 적 있었다.

"김명시는 인천 제물포의 한 성냥 공장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조선반도에서 제일 큰 성냥 공장이었다. 4개 동의 붉은 벽돌 건물에서 온종일 성냥개비를 생산하고 있었다. 유황 냄새며 염산과 송진이 뒤섞인 역한 화학약품 냄새가 담장을 넘어와 코를 맵게 했다. 나무를 잘게 부수는 톱날 소리도 요란했다."(196쪽)

개항을 기점으로 인천에는 담손이 방앗간을 비롯한 정미소가 들어섰고 1918년 인천 축항을 전후로 개항장 주위에 일자리가 창출되어 공장들도 더 빠르게 늘어났다.

배다리 일대에는 소주, 간장을 생산하는 양조공장이나 성냥공장이 들어섰고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에는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이곳은, 일본인 조계지로 지정되면서 형성된 본정통이나 신포동은 물론 조선인 자본가들의 거주지인 율목동과도 다른 색을 띠었다.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하다 보니 도시가 외곽으로 팽창하며 급조된 거주지였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 걸맞도록 예측하기 힘든 골목이 사방 미로로 뻗었다. 식민지 시기, 도시빈민이 거주하는 토막(土幕)으로, 사방을 얼기설기 막고 지붕을 덮어 시늉만 낸 집들이었다.

"제물포 일대 공장노동자의 조직 책임자 정갑용의 흙집은 빈민굴 가운데 길로 끝까지 올라가, 성냥 공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있었다."(197쪽)

배다리에 포진한 공장노동자뿐 아니라 만석동의 동양방적(1934년 가동)이나 정미소, 인천항 주변의 제철, 제강회사, 하역부두의 노동자가 거주하면서 자연스레 '노동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일본 형사나 밀정들의 눈을 피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 건립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이름까지 문헌에 적시된 최초는 1917년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로 알려져 있고, '명시'에 나오는 공장은 여기를 말한다.

현덕의 '남생이'(1938년)에도 하루 1만개 붙여야 겨우 1원50전을 버는 성냥갑 부업에 온 집안 식구가 매달려야 하는 삶이 등장한다. 조선인촌 공장에서는 연인원 500여 명이 한 해 7만 상자를 생산해 국내 소비량의 20%를 담당했다.

성냥 재료인 인을 다루느라 노동자들은 건강을 위협받았지만 하루 열댓 시간 일하면서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인 60전을 받았다.

인천에서 김휘성이라는 활동명을 쓰던 김명시는 야체이카(세포조직)로 공장 사람과 연락하면서 노동운동을 조직한다.

당시의 노동운동은 일본 자본가에 대항하는 동시에 제국주의에 맞서는 독립운동이었다. 불만을 수렴해 파업을 조직한 김명시와 조직은 내지인과의 차별 철폐, 임금 인상, 악질 감독 교체를 요구하는 '삐라'를 준비해 전달했다. "공장에 상주하던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나서고 "2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 마당으로 줄지어 나와 연좌 농성"을 했다. 이 광경은 1930년대 초, 인천 노동운동사에 새겨진 성냥공장 파업이었다.

그러나 김명시는 상부의 지시로 곧 인천을 떠나야 했다. 경인가도를 따라 경성으로 갔다가 상해로 향했고 1932년 백마강역 부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한다.

이후 출소해 국공합작에 참여하고자 연안으로 떠났다. 김명시가 국내에 들어오기까지와 형을 살고 출소해 다시 연안으로 갈 때의 교통수단은 거의 도보였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특급작전이 있고 화려한 변신으로 적을 속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적들은 촘촘히 보초를 섰고 살벌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김명시가 큰오빠 김형선과 함께 요주의 인물이던 것도 문제였다.

그런 김명시에게 가장 불행했던 시기는 이런 시련과 고난의 시절이 아니라 해방 이후였다. 국내로 들어왔을 때 단성사 앞에서 열린 '김명시 여장군 환영대회'의 열기도 잠시, 조선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1949년 9월 체포되었고 10월10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자살한 것으로 다음날 발표된다.

작가 안재성은 이재유의 삶을 추적한 '경성 트로이카'(2004·사회평론)에 이어 '명시'를 내놓았다. 김형선은 두 책에 모두 등장하는데 타자화된 인물로 그려진 '경성 트로이카'와 달리 '명시'에서는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작업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한층 분명해진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화려하게 조명받기는커녕 잊힌 인물의 사상과 삶을 추적해 재현하고 있으며 그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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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재단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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