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첫 문장부터 압도… 진정한 존경의 마음 느껴져

입력 2023-12-21 19:02

[2023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2·끝)] 양진채 소설가 - 이원규 '고유섭 평전'


'황해문화' 동상 사진 처음 접해
이미 많은 평전 저술 검증된 작가
우현의 미술 대한 태도와 혼연일체
단순 연대기 아닌 3D영화처럼 생생
인천 풍경·미술 구체적 연결 경탄

2023122101000312000025022

고유섭 평전 표지
고유섭 평전. 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 568쪽. 2023년 12월 15일 출간
아마 우현 고유섭 선생을 처음 접한 것은 새얼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 '황해문화' 속지에 실린 사진일 것이다.

'개항 1천년의 도시, 인천/동아시아문명의 바다를 깨우는 새얼문화재단'이라는 기치 아래 재단을 소개하면서 도자기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미학자의 동상 사진이 실렸는데 그가 고유섭 선생이다.

새얼문화상 1회 수상자로 고유섭 선생을 선정하면서 사진을 싣고 있었다. 매번 계간지를 받아보는 나로서는 그 덕분에 퍽 친근하게 그 모습을 기억하지만 실은 또 별반 고유섭 선생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평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이원규 선생님이 고유섭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미 많은 인물의 평전을 썼고 인천의 인물로 '조봉암 평전'(2013·한길사)을 쓴 작가의 저력을 알고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며칠 전 책이 나왔고 나오자마자 책을 펼쳤다.



이원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내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젊은 날 고유섭에게 경도되었던 것이 숙명적 인연인 듯 느껴졌다.

죽음을 앞두고도 처절하게 글을 쓴 것을 생각하니 연민도 일었다.

작가는 이따금 자신만이 이 책을 쓸 수 있다는 오만한 독선에 빠지기도 하고 열정으로 인해 영감을 얻고 에너지가 상승하는 효과를 얻기도 한다. 이 책이 그랬다"고 했다.

과연!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은 빼앗긴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라고 하늘이 점지해 내려보낸 듯한 비범한 인물이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그 인물에 진정 존경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쓰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이는 본문에 앞서 인용한 고유섭 선생의 결기와 궤를 같이했다.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古美術)을 관조(觀照)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 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剩餘殘滓)가 아니요. 누천년 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敬愛)와 심절(深切)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섭 선생이 조선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고유섭 선생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는 이원규 작가가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미술사를 개척한 인물, 용동 큰우물이 있는 자리가 그의 집이었다는 것, 경인기차통학생친목모임을 하며 '경인팔경'이라는 시를 썼다는 정도를 알고 있는, 그야말로 얄팍하고 평면적으로 고유섭 선생을 알고 있던 내게 고유섭 선생의 고뇌와 학문적 연구, 역사적 책무 등의 무게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다가왔다.

일제강점기에 고유섭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는, 특히 미술사 혹은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평전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고유섭 선생의 생애와 그 시대의 풍경과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마치 3D 영화처럼 펼쳐진다는 데 있다. 평전은 고유섭 선생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연대기 순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인물과 시대를 오간다.

그뿐인가, 소설의 한 대목처럼 주고받는 대화, 자료를 토대로 그 당시 고유섭 선생의 심정을 짐작하는 문장,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자료 사진, 특히 당시의 제물포라 불리던 인천 곳곳에 관한 얘기는 평전을 읽는 내가 그 시대의 어느 길목을 서성이게 했다. 읽기 시작은 고유섭 선생이지만 인천의 당시 풍경, 역사, 한국미술, 미술사,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던 지식인의 고뇌 등이 입체적으로 연결되고 구체적으로 펼쳐져 곳곳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 책은 평전이지만 인천 역사, 문화, 미술사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어 학문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필한 작가의 노고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훌륭한 미학자를 배출한 인천인데 인천시의 문화예술에 대한 예산 지원은 광역시 중에서 가장 낮고, 여전히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고, 시립미술관조차 없는 인천의 문화 현실이다.

짧지만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천의 큰 인물, 고유섭 선생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2023122101000312000025024
인천문화재단 CI




# 키워드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