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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우리가 온전히 작별하지 못한 세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2)]

공지영·김동한·목은수
공지영·김동한·목은수 기자 dong@kyeongin.com
입력 2024-04-15 20:37 수정 2024-04-16 14:11

참사후 10년… 아픔의 안산


안산에서 400㎞ 떨어진 먼 바다
은사님·선배 하루아침 잃은 참담함
4월 벚꽃 보는 일조차 죄책감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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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고즈넉한 안산시내 밤거리에 추모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자동차로 '400㎞'를 달려야 갈 수 있는 바다. 그 먼 바다에서 안산의 아이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안산의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안산 시민들은 뜬 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아파서 눈물만 났다.

참사는 모두의 아픔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원고 희생학생들은, 지난 10년 안산 시민들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 애도의 시간


"세월호 침몰" 대학교에서 한창 수업을 받던 지원(30·가명)씨에게 짧은 문자가 왔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원씨는 그해 초 단원고를 졸업하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다. 친구는 지원씨가 단원고 졸업생인 것을 기억했다.



지원씨는 서둘러 뉴스를 검색했다.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안심했다. 큰일은 없겠지 싶었다. 점심시간 즈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남윤철 선생님이 세월호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남 선생님은 지원씨가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반장이었던 지원씨를 늘 믿어주며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은사다. 곧장 단원고로 달려갔다. 학교 강당에서 밤을 새며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다. 끝내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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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를 앞두고 안산시 단원구청 부근에 세워진 노란색 리본 조형물이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있다. 2024.4.15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엄마, 배가 침몰한다는데 단원고 같아" 그 날 정진(57)씨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아들이 보낸 메시지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곧장 전날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전날 저녁을 먹으며 아들은 "엄마 형들이 배타고 수학여행 간대"라고 말했다. 정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왜? 비행기 놔두고 배를 타"라고 답했던 기억이다. 제주도가 고향이었던 정진씨는 배가 무서워 비행기를 타고 오갔었다. 큰일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함께 예배를 드리던 단원고 부모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큰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안산시민들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날의 일상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단원고 앞을 지나는데 잔뜩 서 있던 관광버스에 부모들이 올라타던 모습을 보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 '무심코 지나침'이 죄책감으로 남은 이들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탑승자 304명(실종자 5명 포함)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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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변했다. 변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산업단지, 공장이 즐비한 산업도시에서 세월호 도시로, 그렇게 세월호를 안고 10년을 살았다.

선생님의 부고를 들은 지원씨는 곧장 장례식장에 갔다. 지원씨 말고도 단원고를 졸업한 학생들 여러명이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선생님 장례식을 치르는 그 옆으로 단원고 교복을 입은 후배들의 영정이 줄줄이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이 없었다.

이날부터 장례식장을 찾아온 수많은 단원고 졸업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의 장례를 도왔다. 지원씨도 친구들과 팀을 짜서 교대로 장례식장을 지켰다. 10년이 흘렀지만 지원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흑백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정진씨는 이날 이후 종일 뉴스만 봤다. 보면서 계속 울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감정이 격해져서 고1 아들과 괜히 싸우기도 했다.

안산 시민 대다수가 그랬다. 단원고 희생자 250명 중 학교 인근 동네인 고잔동, 와동, 선부동에서만 204명이 희생됐다. 한 집 건너 한 집의 아이들이 사고가 났다.

이 지역 주민들은 "괜히 내 탓인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해 하늘을 못봤"고 "혹시 유가족에게 실수할까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거리에 활짝 핀 벚꽃을 바라보는 일조차 미안하게 느껴졌다.

 

단원고 인근 동네서만 희생자 204명
고잔동 등 '한집 건너 한집' 비극
심리상담 중 일반주민도 69% 차지


유가족 봉사단
지난 2022년 세월호 유가족들로 구성된 4·16가족봉사단이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안산시 와동공원에서 선물나눔을 진행하는 모습. /4·16가족봉사단 제공

4월 20일 정부는 안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일단 안산에 심리상담 지원을 시작했다. 세월호참사 심리지원센터인 '온마음센터'가 정식으로 세워지기 직전인 4월30일까지 안산시민 6천263명이 심리상담을 받았다.

안산시보건소가 집계한 당시의 심리상담 통계를 살펴보면 병원 및 장례식장에서 4천여건이 넘고, 시민상담소에서 2천여건, 이동상담버스에서도 400여건에 달했다.

안산시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당시 일반시민들이 느끼는 심리 증상은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가장 많이 호소했다. 일상생활이 잘 안되고 계속 눈물만 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이때는 오히려 유가족보다 시민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건수가 훨씬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분향소·장례식장 달려간 시민들

함께 눈물 흘리며 봉사활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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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꾸려진 '4160인 시민합창단'이 안산시 단원구청에서 전체 연습을 진행하는 모습. 2024.3.31 /목은수기자 wood@kyeongin.cim

슬퍼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지역 주민들은 분향소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형·동생을 찾으러 멀리 간 엄마아빠를 대신해 안산에 남은 아이들의 엄마아빠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임향미(53)씨는 대한적십자회 안산시 고잔1동 봉사회 총무였다. 향미씨는 참사 당일에 단원고 강당을 찾은 이후, 6개월간 매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조문객을 위해 급식봉사를 했다.

이 기간 중에 향미씨가 쉰 날은 5~6일 뿐이다. 매일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찾는 조문객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지었지만 차마 분향소 안으로는 잘 들어가지 못했다. 노래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치는 마지막 날 그는 겨우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영정 속 아이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

고령임에도 진도까지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던 70대 와동 주민도 만났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 유독 세월호 유가족들이 많아 애달픈 마음이 컸다. 유가족을 만나면 서로 끌어안고 말없이 함께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아 유가족을 도왔다.

고잔동 상인회 등 인근 지역 상인들도 한마음이었다. 합동분향소에서 보름 넘게 질서유지를 도왔고 조문객을 안내하기도 했다. 안산시민 모두가 저마다의 힘을 보태며 아픔을 함께 위로하던 때였다.  

 

→ 3면에 계속("우리도 살아야지" 속절없이 흐른 세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2)])

/공지영·김동한·목은수기자 d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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