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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스토리] 레트로K : 보통의 역사-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공지영
공지영 기자 jyg@kyeongin.com
입력 2024-04-25 20:55 수정 2024-04-26 19:41
왼쪽은 의정부 찌개 골목의 1993년 5월 모습. 당시의 부대찌개 식당들이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경인일보DB,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더 벌려고 서로 싸워 뭐해요" 그렇게 시간이 비켜간 그 골목


"어려웠던 시절 애들 공부시키려 시작"
"미군 햄 넣고 끓여보니 맛 괜찮더라고"
88올림픽땐 '명물찌개'로 잠시 개명도
가게들 수십년 한자리… 비결은 '상도의'

클럽·양복점… 미군 관련 추억들 가득
전성기 상징 향군클럽 '기억저장소'로
촛불 효시 '미군 장갑차 사고' 아픔도


두 사진을 비교해보니, 옛 이름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식당들이 눈에 띕니다. 진미식당, 한양식당, 오뎅식당, 형네식당….

진미식당 김용만 사장님은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아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26살때부터 어머니 도와서 식당을 했으니 오래됐죠. 저희가 시작할 땐 오뎅식당, 주민식당, 형네식당 이렇게 3개 뿐이었어요. 그게 초창기였죠. 그러다 점점 유명해지면서 많을 때는 20개가 넘게 늘어나기도 했죠. 그때는 지금 골목 뒤쪽 아파트 자리에 양주군청이 있었고 교육청도 있어서 낮이고 밤이고 늘 손님으로 꽉꽉 채워졌어요."

형네식당 창업주 박용복 사장님
형네식당 창업주 박용복 사장.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형네식당 창업주인 박용복 사장님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이 뜸한 시간, 신문을 보고 계셨습니다. 조용히 다가가 부대찌개 골목의 옛 추억이 궁금하다고 묻자 반갑게 그 시절을 회상해주셨습니다.

"내가 1972년부터 부대찌개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 지금은 없지만, 그전에는 미군부대가 많았어. 그 부대에서 나오는 고기(햄)도 많았고. 거기서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 그때는 살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먹는 것도 부족하지만 얘들 공부도 가르쳐야 하니까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 그 고기들에다 김치랑 파, 마늘 같은 양념 넣고 우리 식으로 얼큰하게 끓여봤더니 맛이 괜찮더라고. 그래서 팔아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 이름을 뭘로 해야 하나 생각하다 부대에서 나온 고기로 만든거니 부대찌개라 붙인거고."

이름이 잠시 '명물찌개'로 바뀐 일화도 들려주셨습니다. "88서울올림픽 전에, 외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시에서 부대찌개라는 이름이 좀 듣기가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이름을 의정부 명물찌개로 바꾸기도 했어.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그래도 의정부에 없는 사람들 먹여살린 게 부대찌개이니, 그 의미를 살리자 해서 다시 부대찌개로 돌아왔지."

지금은 박용복 사장님의 며느리가 이어받아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40여년 동안 변치 않고 한자리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비결이 뭘까요. 박용복 사장님은 '상도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오래했어도 우리들끼리 싸우지를 않아. 우리 부대찌개 골목은 호객행위, 이런 것도 안한다고. 다들 '도의'를 지키는 마음으로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장사하는 거야. 내가 뭐 더 많이 벌고 이런 욕심 안내.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는거지."

경원식당 이춘화사장님
홍이부대찌개(옛 경원식당) 이춘화 사장.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식당 이름이 바뀌어 인터뷰를 놓칠 뻔했던 홍이 부대찌개, 옛날 이름인 경원식당을 30여년 간 운영해온 이춘화 사장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모두 부대찌개 식당들이지만 다 고유의 맛이 있고 그 맛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알아서 각자 좋아하는 식당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끼리 막 경쟁하고 그러지 않아요. 요즘은 워낙 명물이 돼서 외지에서도 많이 오지만 의정부 사람들은 늘 오는 손님들이 꾸준히 옵니다. 나는 손님들이 너무 고마워요. 어릴 때 먹던 맛이 생각나서 온다는 손님들이 가끔 맛있게 먹고 간다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데, 내가 고맙죠. 손님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그래서 장사 계속 하는 거예요."

의정부 부대찌개만의 특징도 설명해주었습니다. "90년대 후반에 직수입되기 전까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소시지로 만들었어요. 도매상 통해 받는 소시지도 있지만, 갈은 고기를 넣어서 만든 미군 부대 소시지가 직수입되는 거라 더 맛있다고. 이게 고염과 저염이 있는데 고염이 맛이 더 좋고 2배로 비싸요. 어떤 데 가보면 이거 말고 여러 소시지 잔뜩 넣어주는데 영 맛이 없어요. 이걸 넣어야 진짜지."

예전엔 여름 휴가철이면 포천 유원지, 송추계곡 등 경기북부로 놀러왔다가 들르는 휴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물놀이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북부 쪽에 먹을 만한 게 부대찌개 뿐이니, 휴가철 손님들이 여기로 모였어요. 물놀이 하고 와서 신발은 축축하게 젖어있고 아이들 감기 걸릴까봐 수건도 가져다가 닦아주고 그랬죠."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은 이제 전국 맛집으로 알려져 휴일이면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손님들이 많아 주차장 구비가 필수가 됐습니다. 밤 11시까지 장사를 하던 이 골목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요즘은 9시만 되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1959년의 의정부 제일시장 전경
1959년의 의정부 제일시장 전경. /경인일보DB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8개 미군부대로 둘러싸인 의정부에서 서민들의 배를 든든히 채워준 부대찌개의 추억만큼 미군과 관련된 것이 의정부에는 참 많습니다. 부대찌개 골목 끝에도 캠프 라과디아가 있으니까요.

박정근 의정부문화원 사무국장은 "전쟁 직후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에서 남은 걸 가져다 집에서 한국식으로 조리해먹은 것이 식당화가 된 걸로 알려져 있다"면서도 "정작 부대 주변엔 부대찌개가 없고 치킨과 피자, 그리고 자장면이 인기가 많았다"고 소개했습니다.

"미군부대가 의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라 산업시설이 별로 없는 도시예요. 부대가 도시를 부양하는 성격이 강해서 상권도 미군부대에 맞춰져 있는 편입니다. 예전에 의정부에는 배쪽에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길에서 바로 환전해주는 달러상 아주머니들도 많았어요. 양복점도 많았어요. 미군들이 있다보니 양복을 맞추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는 우리가 재료값도, 인건비도 싼데 기술력이 워낙 좋으니 본국 돌아가기 전에 10벌, 20벌씩 맞춰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향군클럽 간판
의정부기억저장소에 그대로 보존된 옛 향군클럽 간판.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미군클럽도 많았습니다. 미군이 직접 운영했던 '향군클럽'이 대표적이죠. 2012년에 문을 닫은 향군클럽은 현재 의정부문화원이 의정부시와 시의회의 지원을 받아 재단장 후 '의정부 기억저장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의정부 기억저장소는 의정부의 옛 추억을 시민들이 직접 한땀한땀 모아 전시해둔 특별한 추억 박물관입니다. 박정근 사무국장은 이곳을 의정부의 기억을 담는 공간, 시민과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캠프 레드클라우드(CRC)는 미사령부가 있는, 가장 큰 미군부대예요. CRC를 중심으로 향군클럽 쪽으로 이어진 이 거리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의정부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입니다. 향군클럽은 이 거리를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구요. 의정부는 미군클럽이 많다보니 음악의 도시이기도 해요. 외국 앨범을 구하거나, 음악 좀 듣는 사람들에게 성지 같은 도시였죠."

주한미군 효순.미선양 추모행사
지난 2009년 미 2사단 캠프 스탠리 소속 장병 50여명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미선양의 7주기를 앞두고 추모비를 찾아 헌화하고 두 학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인일보DB

또 한때는 미군과 갈등도 심하게 겪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미군 장갑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미군의 책임있는 사과를 요구하던 시민들이 CRC 앞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촛불을 들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면서 미군에 강력한 사과를 요구한 것이죠. 촛불시위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말처럼, 의정부 기억저장소 곳곳에 시민들의 추억이 방울방울 걸려 있습니다. 기억저장소 뿐이 아닙니다. 30년 전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에도 유년의 추억과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변하지 않음을 도태됐다 채찍질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숱한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지켜주어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찔끔 눈물도 나는 건 아직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어른이'이기 때문이겠죠.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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