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로 옮긴 '우리 소리'… 프랑스에도 구전될 '판소리의 위대함'
단편영화 속 커플로 출연… 친구서 스승·제자, 동반자로 발전
매년 佛'한국소리 페스티벌'·'Kvox 단체' 등 이끌며 보급 활동
"다섯바탕 전부 출판해 파리 센강서 큰 잔치 벌이는게 우리 꿈"
|
프랑스에서 한국 '판소리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에르베 페조디에(왼쪽)·한유미 부부가 인천의 김경아 명창이 쓴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 프랑스어 번역판을 들고 인사하고 있다. |
지난달 18일 인천 미추홀구 학산소극장에서는 한 백인 남성이 프랑스어로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을 멋지게 선보였다. 한국어가 아니었음에도 객석은 멋진 추임새로 화답했다.
그 가운데 한 한국인 여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판소리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Herve Pejaudier)씨 부부다. 서울에 잠시 머물고 있는 부부를 최근 서울의 한 한옥 카페에서 만났다.
에르베씨는 '우정출연'으로 지난 무대에 섰다. 김경아 명창과 조정래 영화감독이 지난 4월부터 4차례에 걸쳐 선보인 '심청 이야기' 공연의 마지막 무대였다. 강산제 심청가를 4차례에 걸쳐 나눠 부르는 공연이었다.
마지막 4회차에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김경아 명창이 먼저 부르면 이어서 불어로 에르베씨가 연기를 한 것이었다. 불어를 못하는 관객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재미있게 연기했다. 관객들의 '엄청난' 추임새에 그는 많이 놀랐다고 했다.
에르베씨는 "관객이 불어를 모르실 텐데,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추임새를 해주셔서 놀랐다"면서 "아마도 제가 프랑스에서 불어로 판소리를 연기하고 한국 전통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 같은데, 아주 기뻤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가 프랑스 관객이 아닌 인천 관객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김경아 명창과의 인연으로 인천 무대에 섰다. 이들은 지난해 김경아 명창이 정리한 책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파리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들이 프랑스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는 11번째 'K-Vox Festival'(한국소리 페스티벌)에 김 명창을 초청해 무대를 만들었다. 에르베씨의 우정 출연은 그에 대한 화답이다.
아내 한유미씨는 프랑스에서 판소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고 남편 에르베 페조디에씨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면서 한국문학을 불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둘이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소개하면 이렇다. 한씨는 한국에서 언어학(석사) 공부를 마치고 심리언어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 유학 둘째 해에 프랑스 친구가 15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드는데 '외국인' 억양이 있는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제게 도움을 요청했다.
촬영장으로 갔는데 에르베씨가 파트너 배우로 정해져 있었다. 연기 경험이 없었지만 한씨는 30초 정도 커플이 싸우는 장면을 연기했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그걸로 끝이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영화 발표회 자리였다. 그렇게 인연이 된 둘은 친구가 됐다.
"처음에는 번역을 함께 하는 공역자로, 나중에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한씨)과 제자(에르베)로 발전했고 지금은 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 살고 있다"고 한씨는 말했다.
이들 부부는 프랑스에서 '판소리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매년 프랑스에서 한국 판소리를 소개하는 축제 한국소리 페스티벌(K-Vox Festival)과 단체(kvox)를 이끌고 있다. 이들이 판소리 전도사가 되는 데는 번역일이 계기가 됐다.
극작가인 에르베씨는 한국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 연극을 불어로 번역하고 프랑스 배우가 프랑스 무대에서 한국 작품을 불어로 올리는 꿈을 꾸며 희곡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2001년 파리에서 열린 상상 페스티벌에서 판소리 '수궁가'와 '흥보가'의 불어 번역 자막을 부부에게 의뢰해 왔다.
한 씨는 "한국인으로서 좀 부끄럽지만 그때 처음으로 판소리를 문학 텍스트로 접하면서 판소리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했다. 남편 에르베씨 또한 판소리의 음악적 존재를 알기는 했지만 이때를 계기로 "판소리의 높은 음악성과 더불어 문학적 가치가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서의 판소리에 매료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파리 대표 행사인 2002년 '파리 가을 축제'에서 한국을 주빈 국가로 초청하면서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판소리 다섯바탕 공연을 선보인다. 당시 조세핀 마르코비치 축제 예술감독은 다섯바탕 전체의 불어자막 번역을 의뢰했고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불어 자막이 있는 판소리 다섯바탕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게 된다.
이 축제는 2003년에는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이후 한국연극과 판소리 공연을 정기적으로 프랑스에 소개하겠다고 마음먹고 에르베(Herve)와 유미(YuMi)의 이니셜을 딴 힘(HYM)이라는 비영리 한-불 문화단체를 2002년에 만든다.
한씨는 "2000년대 시작된 K-Pop이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 대한 한류 열풍이 2010년 이후에는 한국어와 전통음악 등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며 "프랑스 관객들에게 좀 더 폭넓게 한국문화를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부부는 2012년에 단체 이름을 코리아 'K'와 라틴어로 소리를 의미하는 'Vox'를 조합한 한국소리K-Vox)로 변경하고 페스티벌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1년에 1회(보통 6월) 정기적으로 판소리 공연 및 콘퍼런스, 출판 기념회 등의 행사를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에서 열고 있다. 2024년 올해로 12회를 맞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는 판소리 보급 활동은 쉽고 체계적이다. 판소리가 프랑스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해설이 있는 재미있는 판소리 강연회'를 해마다 열고 있고, 더불어 '불어 자막이 있는 판소리 공연'을 기획하고 공연 후 열리는 '판소리와 소리북 워크숍'을 통해서 '눈대목'과 장단을 직접 배워 불러 보는 강좌도 마련하고 있다.
문학으로도 접근하는데, '수궁가' '심청가' '숙영낭자가' 등을 불어로 번역해 책으로 출판했다. '흥보가' 8월말 출간을 앞두고 있다. 전통 판소리뿐 아니라 창작 판소리도 번역하고 있다. '이자람의 사천가'도 불어 출판을 마쳤고 출판기념회도 마쳤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았다.
에르베씨는 판소리 텍스트를 접하는 프랑스 독자들이 "판소리 작품이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프랑스의 16세기 최대 작가였던 라블레의 작품만큼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한 씨는 "판소리의 위대함은 문학, 음악, 연극 이렇게 3가지 요소를 다 갖춘 장르이기 때문"이라며 "판소리를 음악 공연만으로 보게 되면 이야기가 지닌 힘은 잊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번역가로서 판소리의 '문학적 힘'을 불어를 통해서 프랑스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번역된 판소리가 한국 고전을 대표하는 문학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이 느끼는 판소리의 매력은 무얼까. 에르베씨는 "엄청나게 재미난 이야기가 엄청난 소리꾼의 목소리를 통해서 엄청난 음악으로 관객 앞에서 재현되는 복합적인 예술 장르"라며 "서양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판소리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지만 판소리라는 예술 장르의 위대함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한씨는 "수백년동안 쌓이고 쌓인 여러 층위의 목소리가 한 소리꾼의 몸을 통해서 음악으로 나올 때 관객들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판소리라는 음악예술을 통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맥이 끊기지 않도록 이어온 한국의 전통 예술인들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들에게 우리나라 판소리가 'K-pop'처럼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될 수 있냐고 질문했다. 에르베씨는 "예를 들면 '랩음악처럼 바로크 오페라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일 것 같다. 장르별로 향유하는 대중이 다르다"면서 "다만 거의 20년 넘게 대중문화가 이끄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전통음악예술에 눈길을 주는 이들이 많아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들 부부의 눈앞의 목표는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불어로 번역·출판하는 것이다. 내년에는 '춘향가'가, 후년에는 마지막 남은 '적벽가'가 나올 예정이다. 한씨는 "판소리 다섯바탕이 모두 불어 번역이 되어 출판된다면 저희 둘이 20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게 되는 것"이라며 "아마도 그때는 센 강에서 배를 타며 큰 잔치를 벌이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조만간 또 인천을 찾을 예정이다. 오는 8월께 백령도 심청각을, 또 가을에 '청어람' 공연에도 설 예정이다. 에르베씨는 "심청가를 번역하면서 인당수를 상상했는데, 심청각에서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불어로 꼭 불러보고 싶다"고 했다. 한 씨는 가보고 싶은 도시를 돌며 판소리를 가르치며 늙어가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한국어를 가르쳐 왔는데 잠시 쉬고 있습니다. 제가 전 세계에서 로망하는 도시가 몇 곳이 있어요. 그 도시에 잠시 머물면서 한국어와 판소리를 가르치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습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