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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대한민국]작가·상명대 교수 박범신 그가 말하는 행복

윤인수 윤인수 기자 발행일 2014-09-01 제3면

혁명수준의 문화인프라 구축… 증오사회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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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범신 작가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본에 의해 인간본성 나날이 해체돼
개개인이 정치·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만세' 외쳐야…
'나의 개혁' 없이 정치 탓하는 것은 공염불


경인일보 창간 69주년을 맞아 소설가 박범신은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의 르네상스적 전환도 결국은 이 시대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사람들의 세상에 이를 수 있을까. 문화부 윤인수 부장이 묻고 또 물었다.

-요즘 대한민국이 침울하다.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는지 국민들의 회의가 커졌고, 군부대 폭력사건은 우리 시대의 인성을 의심케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가 총체적 인본주의 위기에 직면한 듯하다. 이에 대한 시대 진단을 내린다면.



"자본에 의해 인간 본성이 나날이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 체제하의 모든 세계인의 삶이 거의 파국의 턱밑까지 다다랐고, 가까운 시일 내에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자본이 우리 삶을 대부분 장악해버려서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좋은 카페는 많아졌는데 진정한 만남은 없고, 문명의 이기는 발달했는데 더 바쁘고, 달나라에도 가는데 이웃은 더 멀고, 공부는 많이 하는데 지혜는 줄어들게 된 것은 자본이 우리를 끝없이 이간질시키기 때문이다. 매우 위험한 국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5천년동안이나 강대국 틈에서 모국을 지키며 살아온 민족이다. 파국에 직면한 듯 보이지만, 결코 파국을 맞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자본주의를 선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가 자본주의의 주인이 되면 된다. 자본주의는 좋은 점도 많다. 삶을 안락하게 하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을 삶의 전략으로 차용하면 된다. 우리들이 정체성을 버리고 자본주의에 소속되고 예속되는 태도가 문제다. 내가 주인이 돼서 자본주의를 삶의 능동적 전략으로 삼으면 좋아질 것이다."

-양극화, 특히 경제적 양극화가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양극화나 정파주의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기득권 집단이 있고 지금도 그렇다. 정파상업주의가 문제다. 그들에게 속아 끌려 다니면서 양극화, 정파주의에 너무나 즉발적이고 천박하게 대응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회 최전선에 요란하게 회자되고 있는 것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만큼의 번영과 민주화를 단시간에 이룬 우리의 문화정서적 수준도 만만치 않다. 눈에 얼른 띄지않는 것뿐이다. 중도개혁적 중산층이 그렇게 지리멸렬한 상태는 아니라고 본다. 정보를 제 입맛에 맞게 전달하는 일부 언론과 잘못된 정치시스템, 기타 자본에 장악당한 사회현상 등이 전면을 휩쓸면서 건강한 중도개혁파의 목소리가 퍼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더는 이대로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우리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개혁적 중산층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언론이나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해야 할 중요한 몫이다. 문제는 그들을 광장으로 견인해 낼 지도자나 양심적 견인그룹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 역할은 다수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출구를 만들고 앞장서 견인할 진정성 넘치는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다."

-이 시대, 혼란의 주범으로 정치를 꼽는 국민이 많다. 정치는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변해야 할까.

"우리 각자가 '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 자본이나 정치권력의 조작에 따른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내 스스로 주인이 되는 독립선언이다. 정치권이나 국가나 체제는 우리들이 행복해지는데는 별 관심이 없다. 국민 총생산을 늘리려 할 뿐이다. 대통령 하나가 잘 하면 우리가 다 행복해 질 거라는 생각은 순진한 환상이다. 주체적으로 현실을 보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본의 노예에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삶의 개혁을 이뤄야한다. 나의 개혁에는 눈감거나 소홀히 하면서 정부나 정치가만을 탓하는 태도로 개혁을 외치는 것은 공염불이다. 반인간, 반개혁으로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전략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정치나 국가는 생산성 제고를 통한 강대국이 되려는데만 계속 매진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닌가."

-행복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부탄의 예를 들었다. 무엇이 부탄을 행복하게 하는가.

"부탄에는 '행복청'이라는 기관이 있다. 가령, 누군가 건축허가를 요청하면 행복청은 이 건물을 지었을 때 건물주와 이웃에게 함께 좋을 점을 심사한다. 우리는 법률상 문제가 있는지 여부만 따지지만, 부탄은 이웃에게 이익이 없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공동체가 최우선 가치다. 우리는 노인들한테 20만원 주네, 10만원 주네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한다. 지금의 노인들은 자식을 위해 야수적인 노동력을 바쳐가며 이 나라를 구한 세대다. 독거노인들에겐 평균 3.6명의 자식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이들 중 둘셋은 중산층이다. GDP 성장을 늦추더라도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소중하다고 국가가 앞장서서 가르쳤으면, 국가가 10만원 20만원 안줘도 자식들이 부모를 돌보았을 것이다. 부모를 돌보는 것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앞장서 가르친 게 누군가. 국가 아닌가. 공동체가 해체됐으니 복지의 부담도 전적으로 국가가 져야한다. 복지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소외된 이웃이나 버림받은 노인을 오직 국가에 내맡겨야하는 사회는 허리가 휠 수밖에 없다. 공동체를 앞장서 깨버리고 GDP에만 명운을 걸었던 개발제일주의 국가가 앙갚음을 당하는 중이다. 그 어림에 복지문제가 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고 살 것인지도 고민하는 나라와 지도자가 좋은 나라 좋은 지도자라 생각한다."

-이 시대의 혼란이 인문학의 부재 혹은 쇠퇴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에 동의하나.

"인문학이 스스로 패망한 건 아니고, 자본 중심의 정치 사회 구조가 인문학을 내몰고 버린 것이다. 자본 세력과 정치권력과 문화가 한 덩어리가 돼서 오로지 경제만을 외치는데 무슨 인문학이 발현하겠나. 박정희 대통령이 잘 살자는 불씨를 가져왔는데, 그와 함께 온갖 갈등과 분열 등의 그늘도 생겨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준 좋은 유산을 받되, 나쁜 건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청출어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아버지 때와 똑같이 하려는 것 같다. 원래 자식에겐 '살부의 본성'이 있다. '아비'를 죽여서라도 잘못된 구조는 강력하게 부정, 새로 태어나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식들까지 물질주의에 오염돼 애비 살해의 욕망, 다시 말해 자기부정의 욕망이 사라졌다. 성공 못하는 애비는 무시하고, 성공한 애비에겐 빌붙어 자식들까지 오직 그 성공을 나눠 가지려고만 한다면 어떤 역사 발전이 있겠는가. 우리는 50여년 불같이 살아왔다. 물 불 흙 공기 4대 원소가 고루 균형을 잡고 있어야 건강한 사회인데, 압축성장시기는 '불'의 시대였다. 그 결과 '물'이 부족한 사회가 됐다. 물은 모성, 생명, 관용, 문화이다. 지금은 오직 불같은 전투력으로 살았던 애비들의 시대를 부정해야 한다. 죽여야 한다. 새로운 삶의 동력을 물에서 끌어내야 한다."

-최근 방한했던 교황이 일으킨 선한 메아리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자기정화 기능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문제해결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지 않는 것은, 만나면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우선 바라는 것은 따뜻한 위로와 공감이다. 위로를 바라는 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원초적 심정이다. 교황이 오시는데 100만명의 인파가 운집하는걸 보면서 엄청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교황이 와서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거기 모인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상처받은 내 마음을 알고 같이 울어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진실한 위로를 바라는 것인데, 그 위로를 우리나라 '애비들'에게서 얻지 못하고 로마에서 온 애비에게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의 애비들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애비들인 지도자들은 지금도 헛다리를 긁고 있다. 국민들이 당장 바라는 건 경제지표 향상이 아니다. 공감에 따른 위로와 격려가 우선이다."

-지금과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르네상스적 전환을 이루려면 어떤 각성과 변화가 필요한가.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높은 자리에서부터 내려와야 한다. 힐링의 프로그램이 사회 곳곳에 깔려야 한다. 위로받을 수 있는 문화정책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창안해야 한다.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상처를 봉합하고 위로함으로써, 적들과도 화해시키고, 헤어진 사람들도 만나게 해야 한다. 그게 참된 정치이고 지도력이 아닌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정치도, 경제도 아니다. 문화밖에 없다. 지금처럼 증오심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어필로는 위로가 안 된다. 그러나 문화가 끼어들면 경상도 여자와 전라도 남자가 연애하는 데 문제가 없다. 남과 북, 노인과 청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혁명 수준의 투자와 장려를 통해 창의적인 르네상스의 문화 프로그램들을 사회 밑바닥에 바둑판처럼 깔아놓으면, 정치공학적 술수로 어떻게 해보려는 반인간적 시도는 모두 무력해질 것이다. 창조 경제가 아니라 창조문화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인문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창조문화적인 사회 환경만이 우리의 상처, 분열을 치유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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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는…

■ 출생
1946년 충남 논산
■ 학력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 경력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로 등단
'73그루프'를 조직해 동인으로 활동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1995~2004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7년 KBS 한국방송공사 및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대담/윤인수 문화부장<편집부국장> 정리/민정주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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