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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중일보를 생각하다]경인지역 언론 어떻게 변모했나

정진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14-09-01 제4면

1940년대 '대중일보 vs 인천신문' 이념전쟁 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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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박성현기자

해방직후 '수도권 최초' 우리말 신문
한국신문 연표, 경인일보 흐름 명시

1959년 '경기사전'에 발행부수 공개
대중일보 이은 인천신보 8500부 발행
정기간행물 폭증 후 군정때 '통·폐합'

30여년 흐른 지금은 '1인 미디어시대'
독자와 함께 '언론 르네상스' 이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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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사전편찬위원회가 1959년 6월 발간한 '경기사전' 표지. 이 책은 범례에서 '경기사전은 경기도에 관한 행정, 산업, 경제, 교육, 종교, 문화, 고적, 인사 등을 수록한 일명 기관사전(機關事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기사전의 각종 통계는 1956~1957년 사이의 것을 중심으로 했다.
언론계에도 혁신이 필요한 때다.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언론계의 최일선에 있는 기자와 눈높이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자들이 독자로부터 신뢰를 잃는 경우도 잦다. 언론계에도 르네상스가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해방 직후 경인지역 첫 신문, 대중일보로 시작해 지금껏 수도권 언론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인일보가 창간 69주년 기념호에서 초창기 경인지역 언론의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획을 4면과 5면에 걸쳐 마련했다.

4면에서는 대중일보에서 인천신보로 이어지는 시기의 언론 상황을 간략히 살피고, 5면에서는 중앙 언론사의 인천 주재 기자로 일하면서 지역 언론계를 외부인의 눈으로 지켜본 신원철(74) 인천 연수원로모임 회장과 경인일보 새내기인 윤설아 기자와의 5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대담을 준비했다.

1964년 기자생활을 시작한 대선배가 이제 막 기자사회에 발을 디딘 풋내기 기자에게 들려주는 진솔한 얘기는 언론계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69년 전인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는 '대중일보'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저 나온 우리말 신문이었다. 그리고 5개월여가 지난 뒤 역시 인천에서 인천신문이 창간되었다. 경기도에서 지역 언론의 양립시대가 이뤄진 것이다.

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의 창간 당시 상황을 1973년에 나온 '인천시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광복후 인천에서 최초로 발간된 지방지는 대중일보였는데, 개업의(開業醫) 고주철을 사장으로 하여 1945년 10월 7일 창간하였다. 그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에는 김홍식을 사장으로 하고 엄흥섭을 편집국장으로 하는 인천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당시는 좌우익의 투쟁이 치열한 때였는데, 인천신문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한때 노골적으로 좌경화하여 그와는 반대의 논진을 펴고 있는 대중일보와 대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후발 주자인 인천신문은 좌익을, 선두에 선 대중일보는 우익을 각각 대변했다는 얘기다. 인천은 해방 전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언론 활동도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시사가 말하는 것처럼 대중일보가 우익을 대변한 적도 있지만, 그 이전에는 좌익 일변도였다.

인천신문 창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이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먼저 지냈기 때문이다. 대중일보는 해방공간의 대표적 좌파 시인인 임화의 시를 창간 축시로 받아 실을 정도였다. 대중일보에 누가 근무하느냐에 따라 신문의 논조가 좌와 우를 오갔다.

인천에서 해방 직후 수도권 최초의 신문이 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인천에 기사를 작성할 기자와 신문을 만들 인쇄시설이 그만큼 빨리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인천을 '작은 일본'으로 건설하려 했던 구상과 맞닿아 있다. 인천 개항 7년 후인 1890년 1월 28일 일본인들은 인천에서 '인천경성격주상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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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사전'은 '신문 정기간행물 발간상황' 항목에서 당시 발간되던 신문들의 발행부수까지 공개했다.
국내 지역신문의 효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연히 인쇄시설도 인천에 들어섰다. 이후 인천은 기자들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식거래나 선물거래와 비유할 수 있는 미두(米豆) 전문 기자도 미두장(米豆場)이 있는 인천에 많이 상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신문 활동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숨길 일은 아니다. 지나온 과거를 정확히 바라보고, 거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의 르네상스일 것이다.

대중일보는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 경기신문, 경인일보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어왔다. 이 같은 사실은 1983년의 '한국 신문 100년 연표'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다.

'한국 신문 100년 연표'는 경기매일신문을 대중일보와 같은 신문으로 기록하면서 특기사항에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경기신문'으로 이어지는 경인일보의 흐름을 명시했다.

경기신문은 1973년 9월 1일, 경기일보·경기매일신문·연합신문이 통합된 것이며 1982년 2월 30일 지금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고쳤다는 점도 '한국 신문 100년 연표'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1950년대 경기도에는 어떠한 신문들이 있었을까. 또 그 신문들의 발행부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신문 발행부수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에는 신문의 발행부수가 기밀사항처럼 취급되었으며, 대개의 신문들은 발행부수를 크게 부풀리고는 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1950년대 경인지역 신문 발행부수를 살펴본다는 것은 지금에 비춰보면 신기할 정도다.

지금까지 기자가 확인한 바로는 경인지역 신문의 발행부수가 공인매체를 통해 공개된 것은 1959년 발간된 '경기사전(京畿事典)'이 처음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신문을 처음 만들던 1890년대 '인천경성격주상보'는 500부 정도 찍었던 것으로 1933년 간행된 '인천부사(仁川府史)'는 기록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발행부수의 많고 적음에 의미를 부여할 일이 아니다. 신문이 나오느냐 마느냐가 더욱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기사전은 1956년과 1957년 사이의 통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경기사전은 정기간행물을 인천신보(대중일보에서 이름이 바뀐 것)와 경인일보(현 경인일보와는 다른 신문) 등 2개의 일간지와 열흘마다 나오는 순간지(경기민경) 1개, 주간지(인천공보, 주간 경기, 주간 인천) 3개, 월간지(경기화보, 경기도정) 2개를 소개하고 있다.

일간지는 모두 인천이 발행지였으며, 경기민경은 경기도 경찰국에서, 인천공보는 인천시청에서 각각 발행했다. 주간 경기는 수원에서, 주간 인천(연합신문의 전신)은 인천에서 각각 나왔다. 월간지 2개는 모두 경기도청에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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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언론계에서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추앙받는 오소백(1921~2008) 기자의 대표작 '기자가 되려면'(개정·증보 12판)에 수록된 '한국 신문 100년 연표'의 '경기매일신문'과 '대중일보' 설명란.

대중일보에서 이어져 온 인천신보는 8천500부의 발행부수를 보였으며, 경인일보는 7천부였다. 경기도 경찰국은 1만2천부의 경기민경을 찍어 열흘마다 배포했다. 나머지 주간지와 월간지는 3천부에서 6천부 사이였다.

경기사전에 기록된 당시 경기도 인구수는 총 216만9천303명이었다. 인천이 29만6천313명이었고, 수원이 7만1천918명이었다. 이때의 인천 인구는 강화(10만5천402명)와 옹진(1만5천347명)을 제외한 것이다. 지금 경기도·인천의 인구는 1천300만명을 헤아린다.

경기도청이 서울에 있던 시절, 그리고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가 많던 시절, 경기도 제1의 도시 인천에서 발간되던 일간지의 발행부수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6년 1월에는 인천교육청이 '문맹자 완전 퇴치 운동'을 전개할 정도였다. 당시 인천의 문맹자를 9천명 정도로 당국은 파악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당시는 폐허를 딛고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르네상스 시대'였다.

최헌길 경기도지사는 경기사전 추천사에서 '정부 수립 후 10년은 실로 건설의 10년이었고, 국가중흥의 10년이었다'고 전제한 뒤 '정치, 경제, 외교, 교육 등 전반에 걸쳐서 눈부신 발전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문화면에 있어서는 보다 획기적인 성장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신문, 잡지 등 문화간행물이 선진국가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1960년 인천시가 집계한 신문 등 정기간행물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 인천에서만 일간신문 49종, 주간지 49종, 월간지 3종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5·16 쿠데타 이후 언론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앞에서 얘기한 경인일보가 5·16 후 군정(軍政)이 포고한 시설 기준 미달로 폐간되었다.

또 '인천통신', '동서통신' 등의 통신사도 5·16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군사정권 아래서 1973년과 1980년 두 차례 언론 통폐합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뒤 30여년이 흐른 지금 언론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1인 미디어 시대'라 일컬을 정도다.

언론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것은 언론 종사자만의 몫은 아니다. 언론계는 독자와 함께 생각해야 하고, 이를 교류해야 한다. 그 속에 '언론 르네상스'의 답이 있을 것이다.

/정진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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