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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의 인사이트] 어느 아파트 이야기 - 욕망의 탑이 쌓아올린 도시 풍경

신지영 신지영 기자 입력 2021-08-13 14:09:09

한국에 사는 사람의 절반은 아파트에 거주합니다(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전체 2천89만 가구 중 51.1%). 한국에 소재한 1천813만채의 주택 중에 아파트는 1천129만채로 전체 주택 중 62.3%를 차지했습니다(위 조사).

가히 아파트는 한국인 주거의 보편 양태라고 할만합니다.

조카와 함께 동네를 걷던 어느 날 "작은 아파트"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카는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3층 짜리 공동주택을 '작은 아파트'라고, 단층 짜리 주택은 '더 작은 아파트'라고 부르더군요.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어린이에게 세상 모든 주택은 '아파트'였습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세상이 지금처럼 아파트 천지는 아니었습니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빌라에 사는 사람도 있고, 더러 2층짜리 단독주택 거주자도 있었죠. 이제 단독주택이냐 빌라냐 아파트냐 하는 것보다는 힐스테이트냐 롯데캐슬이냐 래미안이냐의 분류가 더 보편적인 시대가 됐습니다.

1990년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김현은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이란 글에서 아파트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파트는 이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기가 우월함을 확인하는 전시 공간이 된다. 60평대 아파트 사람은 40평대 아파트 사람보다 우월하고 40평대 사람은 20평대 사람보다 우월하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어린이에겐 세상 모든 주택은 '아파트'

단독주택이냐 빌라냐 아파트냐 하는 것 보다 브랜드 분류가 더 보편적 시대로

우리 삶의 디폴트 값이 된 아파트, 그 중 경기도에 있는 어느 아파트의 이야기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김현은 우물이 있고 마당이 있고 나가면 선창이 있고 금세 산에 닿을 수 있는 '땅집'에서 자라 내가 밟고 있는 바닥이 아랫집 사람의 지붕이 되고, "오분 안에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없는"(위 글) 아파트에 사는 데 현기증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땅집에는 어린이가 탐험하고 싶은 공간이 있고 그 속에 이야기와 수수께기가 있었지만, 아파트에는 평면 밖에 없고 궁금할 것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얇은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죠. 김현이 작고한 지 30여년이 지나 얇은 삶이 주를 이루는 세상에서는 차마 인간적이라고 말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어느새 우리 삶의 디폴트 값이 된 아파트, 그 중 경기도에 있는 어느 아파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파트는 재산일까 거주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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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신도시 최초로 리모델링사업 승인을 받은 분당 한솔마을주공5단지 일대 전경. /경인일보DB

A아파트는 노태우 정부의 1기 신도시 공급의 첫 신호탄으로 탄생했습니다. 1천 세대 남짓의 단지는 구축 아파트답게 지하주차장이 없습니다. 역과 가장 가까운 곳, 시가지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죠.

A아파트에 '리모델링' 이야기가 나온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경기도에서 가장 먼저 리모델링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단지일 수 있습니다. 초역세권에 지하주차장이 없어 주차난이 심했고 그리 높지 않은 층고로 언제나 리모델링 1순위로 거론됐죠.

리모델링이 가시권에 들어온 건 지난해 일입니다. 시공사가 선정됐고 설계가 나왔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복도식 아파트의 1개 층 중 1개 세대를 없애 평수를 늘리겠다는 설계가 나온겁니다. 설계대로면 10평대 아파트는 20평대로, 20평대 아파트는 30평대로 면적이 넓어지게 됩니다.

졸지에 거주하고 있는 자리에서 '소멸 세대'가 돼 다른 동으로 옮기게 된 주민들은 반대 입장을 폈습니다. 반대파에는 리모델링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이주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멸세대도 있었고, 2억원에 달하는 분담금을 낼 여력이 없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태우 정부 1기 신도시 공급의 첫 신호탄으로 탄생한 'A아파트' 

리모델링 가시권에 들어오자 1개층 중 1개 세대 없애 평수 확장 설계

졸지에 거주하고 있던 자리서 '소멸 세대'가 된 주민들 반대 입장 펼치자

강제로 주택 매각하는 청구 소송 시작… 조합 승소땐 조합에 주택 매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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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0년대 평촌지구 개발 후 모습 /안양시 역사·포토갤러리
 

소멸 세대 주장은 이렇습니다. 이주 시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가게 되고, 도로변으로 이동하면서 소음 피해와 채광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왜 우리가 소멸 세대가 되야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반대입장에 서 있는 한 소멸 세대 주민은 "쉽게 말해 인당수에 우리 중 한 명을 던져야 하는데 그게 누구인지를 정하는 거죠. 평수를 넓히려면 소멸 세대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너희가 맡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왜 우리여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이유는 없어요. 희생이 필요하니 전체를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 그 말 밖에 없는거죠"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인당수에 한 명을 던져야 하는데 그게 누구인지를 정하는 거죠
돈이 없어 리모델링 분담금을 낼 수 없는 세대와 소멸 세대로 묶여 이런 리모델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세대, 모두 100가구가 넘게 리모델링 반대 입장을 폈습니다. 이들에게 최근 소장이 날라왔습니다. '매도청구소송'이었습니다. 리모델링을 반대하는 세대 때문에 리모델링 사업이 진행되지 않으니 강제로 주택을 매각하는 청구 소송이 시작된 겁니다.

조합이 승소하면 반대 주민들은 감정액으로 주택을 조합에 매각해야 합니다. 강제 이주와 같은 조치입니다. 아파트 가치를 높여 재산권을 향상시키려는 리모델링으로 거주권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겁니다.

 

낯익은 상황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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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수원시내 일대 모습. /경인일보DB

반대 주민들에게 도착한 매도청구소송 소장을 보겠습니다. "리모델링의 허가를 신청하기 위한 동의율을 확보한 경우 리모델링 결의를 한 리모델링주택조합은 그 리모델링 결의에 찬성하지 아니하는 자의 주택 및 토지에 대하여 매도청구를 할 수 있다"

주택법은 주민 75%의 동의를 얻으면 매도청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수가 리모델링을 원한다면 사업이 가능하도록 거주권리를 침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겁니다.

A아파트의 충분한 사업성, 이미 확보된 주민의 동의, 성공적인 리모델링을 위한 신속한 절차의 필요성을 고려하면 매도청구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느 날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된 주민 입장에선 이런 상황을 다수결의 횡포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기록적인 부동산 시세 상승에 힘입어 리모델링 사업의 성공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며 결의를 다지는 단지도 부지기수입니다. 특히 1기 신도시, 1기 신도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구도심이 다수 위치한 경기도에 리모델링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거셉니다.


주택법은 주민 75% 동의 얻으면 매도청구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다수가 원한다면 사업 가능하도록 거주권리 침해할 수 있도록 해

소송 당한 주민들 "몇십 년 살아온 우리는 집 팔고 떠나야 하는 건가요?" 

신도시서 헌도시가 된 아파트의 도시에선 '리모델링의 욕망' 꿈틀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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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14일에 촬영된 군포 산본신도시 전경 /KTV 제공

매도청구소송을 당한 주민들은 말합니다. "다수가 원한다면 우리는 집 팔고 떠나야 하는 건가요. 몇십 년을 잘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이사 가라는 게 말이 되나요. 돈(분담금)도 돈이지만 이 동네 시세가 너무 올라서 이사 갈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매도청구소송'. 우리는 이 장면을 많이 봐왔습니다. 재건축에서 매도청구권이 인정되고, 나아가 재개발에선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개념의 토지수용이 이뤄집니다. 용어는 다를지 몰라도 자기 의사에 반해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본질은 같습니다.

재건축·재개발에 반대하며 망루에 오른 사람들의 실루엣이 자연히 연상됩니다. 더 나아가면 신도시 개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의 토지를 수용해서 그 위에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포도밭이었던 땅 위에 세워진 A단지 역시 그렇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의 마천루는 누군가의 재산권을 침해해 이뤄진 자본주의의 망루입니다.

우리도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싶다. 그게 죄냐
토지 강제 수용에 반대하는 현수막은 지금 3기 신도시 개발 예정지에서도 나부끼고 있습니다. 한쪽에선 사전청약에 수십만 명이 몰릴 때, 한쪽엔 내쫓지 말아 달라고 항변하는 소수의 주민들이 있습니다. 게중엔 더 많은 보상금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도 있을 것이지만 오래 살던 땅을 떠나고 싶지 않은 원주민도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강제 수용된 토지 위에 신도시가 건설됐고, 30년이 지나 신도시가 헌도시가 된 아파트의 도시에선 리모델링의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리모델링 기사를 여러 차례 쓰면서 기사에 항의하는 취재원을 여럿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도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싶다. 그게 죄냐"고 말했습니다. 어디에 사는 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세상에서 저 노골적인 욕망은 곧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30여 년 전 김현은 두꺼운 삶을 잃어버린 아파트 주민의 얇은 삶을 아쉬워했지만, 이제 얇은 삶들은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마치 남의 집 지붕을 바닥 삼아 쌓아올린 아파트처럼 욕망의 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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