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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한 안산관아에 있던 객사(취암지관). /원일중 제공 |
풍수지리설 영향으로 평지에 읍성 조성
중앙권력의 상징… 향교·사직단 등 부설
오늘날 시청(市廳)은 행정의 중심입니다. 많은 민원인이 시청을 찾아 아쉬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죠. 또, 시청은 시의 정책을 시민에게 알리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대민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청은 시민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600여 년 전 조선 시대가 시작되면서 안산의 시청, 즉 안산 관아는 어땠을까요?
처음에 안산 관아는 목내동 성안마을 소릉(素陵)지 부근에 있었습니다. 이를 추정하는 근거가 『안산김씨 족보』에 있는데 그 기록을 살펴보면,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돼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에 있던 위치에서 다시 현재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으로 이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관아는 지금 위치에 자리합니다.
관아에 들어서는 기본 건축물로는 고을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인 동헌, 가족을 동반한 수령일 경우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내아, 국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참배하는 공간이며 공적 여행자의 숙소이기도 한 객사, 해당 고을의 징세와 관련한 업무를 보던 향청, 아전들이 일하던 질청, 죄인을 심문하는 옥사, 창고 등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주변에 항상 같이 부설되는 것이 있는데, 지방의 군마다 향교를 세워 훈도를 파견해 지방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제사시설로 사직단, 여단 등을 세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 시대인 고려는 행정의 중심인 치소가 군사적인 기능이 많아 산성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조선 시대에서는 평지의 마을에 읍성을 만들어 관아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관아에는 해당 고을을 책임진 수령이 중앙권력인 왕의 명을 받들어 행정을 총괄했습니다. 그런데 고을을 책임진 수령 중에는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이 있는가 하면 비리와 악정을 펴 백성들의 원성을 받았던 수령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에 민선 자치단체 장(長)들을 보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수령과 악정을 베푼 수령들을 비교해 보면, 시간은 흘러가도 예나 지금이나 수령의 선정과 탐욕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합니다.
/신대광 안산 원일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