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上)] 행복마을 사람들
관리업체 감감무소식에 입주민 대책회의
전셋집 잇단 경매통지서에 다급해진 마음
1년6개월간 쫓겨나거나 삶의 끈 놓기도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 행각을 벌인 일명 '건축왕' 남헌기(62)에게 보증금을 떼인 청년 등이 신변을 비관해 잇따라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건축왕이 지은 아파트와 빌라 등 수많은 건물 이름에는 역설적이게도 '행복'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다.이 사건이 불거진 뒤 1년 6개월여 동안 경인일보 기자들은 피해자들을 만나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기록했다. 희생자 1주기 추모제에 맞춰 그동안 독자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벼랑 끝 삶과 이를 지켜본 기자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은 고된 하루를 마친 뒤 돌아가 지친 몸을 충전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러나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집은 지옥과도 같다. 벼랑 끝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같은 처지의 이웃을 살피는 사람들이 그곳에 산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인천 미추홀구청에서 숭의오거리 방향으로 5분 정도 걷다 보면 '행복마을' 1단지가 나온다. 전셋집 보증금 시세는 8천만~1억원 정도로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경인전철 1호선 제물포역과 가까워 서울로 출퇴근하기도 좋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아이들이 다닐 만한 학교들도 있다. 1단지 말고도 행복마을에는 이런 단지가 수십 개 있다. 가구수로만 보면 2천700여 가구에 달한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집이 경매에서 낙찰되면 많은 세입자가 돈을 한 푼 받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날 처지였다. 1단지 주민들은 머리를 맞댔다. 1102호 병호(가명)가 나서 주민대표를 자처했다.
그는 옆 단지 대표들과 함께 국회, 인천시청, 인천경찰청 등을 찾아다니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다른 주민들은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들거나 법률 자문을 받으며 정보를 모아갔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아파트 관리업체도 전세사기 일당과 한통속이었다. 주민들이 항의차 관리비를 내지 않자 전기와 수도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등 시설은 고장 난 채로 방치됐다. 쓰레기조차 치워지지 않았다. 행복마을 1단지는 점점 엉망이 됐다.
'흡연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해주세요', '분리수거는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행복마을 1단지 주민들은 하나하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간 예전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거라 믿었다. 서로 의지하며 버티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벌써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주민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1단지 세입자 절반은 경매에 집이 넘어가 쫓겨났거나 빚을 내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갔다. 전세보증금을 떼인 청년 등 행복마을 주민 4명은 잇따라 삶의 끈을 놓았다.
빈집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1단지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한 약속들은 흐지부지됐다. 비상계단이나 복도에선 담배 냄새가 다시 풍겼다. 분리수거장에는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뒹굴었다. 행복마을 1단지 현관문 앞에는 '이곳은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입니다'라는 스티커 등이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 있다.
/기획취재팀
→2편에서 계속 (생이별 당한 세가족, 누가 그들의 '일상'을 앗아갔나)
※기획취재팀=변민철·백효은 기자(인천본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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