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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마음속 깊게 파인 홈(Home)… 벼랑끝 사투는 '현재진행형' [미추홀 전세사기 기록⑥]

입력 2024-02-27 19:41 수정 2024-03-06 17:40

[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


작년 6월 특별법 마련했지만 한계 명확
'최우선 변제금 대상' 전체중 51.7%만
87.1% 경제적 어려움… 92.7% 우울감
 

천막 농성장

2023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천막 농성장에서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주민들과 함께 머물던 지수(활동명)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행복마을 주민들이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국회에 요구하며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다. 벼랑 끝 삶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주민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수는 이른바 '주거빈곤' 세대로 불리는 사회초년생 등 청년들을 돕는 시민단체 '민달팽이유니온'을 이끌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 활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건축왕' 남헌기(62) 일당에 속아 보증금을 떼인 청년 등 4명이 그해 2~5월 잇따라 세상을 등졌다. 

나도 죽어야 (정부) 대책이 마련될까요?
- 피해자 D씨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세요
- 지수
행복마을 주민들은 특별법 제정에 주저하던 정부와 국회의 답답한 모습에 지쳐가고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 구제 방안이 담긴 특별법은 그해 6월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란 이름의 이 법에 따라 뒤늦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한계가 명확했다.

잠시 멈췄던 전셋집 경매는 속속 재개됐다. 주민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어느덧 입춘을 맞이한 2024년 2월은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이 벌어진 지 1년6개월, 그리고 특별법이 시행된 지 9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지수는 그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주민들의 비참한 삶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주민들을 통해 알고 지내던 한 지역신문 기자가 실태조사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해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행복마을 주민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이런 조사만 벌써 몇 번 했다. 무슨 도움이 됐느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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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주민들의 마음을 다시 연 지수는 기자와 함께 2024년 2월2일부터 2주간 온라인(구글폼)과 오프라인 방식을 겸한 '주거·생활 환경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행복마을 244가구가 조사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행복마을에 들어온 세입자인 이들은 주로 1억원 미만의 보증금으로 전세계약을 맺은 서민들이다. 또 다수는 최근 남헌기에 대한 사기죄 법정 최고형 판결(징역 15년)에서 인정된 피해자들이다.

연령별로는 30대가 46.7%(115명)로 가장 많았다. 이어 40대(26.2%), 50대(10.3%), 20대(9.4%), 60대 이상(7.4%) 순이었다.

응답자 중 76.3%(186명)는 집에 대한 경·공매 절차가 개시됐거나 잠시 유예된 상태여서 언제든 집에서 쫓겨날 처지였다. 그런데도 전체 조사 대상자 가운데 최우선변제금(보증금의 약 30% 수준)을 받을 수 있는 주민은 51.7%(125명)뿐이었다. 나머지는 그 대상이 아니거나(89명, 36.8%) 본인이 최우선변제금 대상자인지조차 모르는 상황(28명, 11.6%)이었다.

전체의 87.1%(209명)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47.5%(114명)는 생활고로 금융기관 등에서 대출을 받았다. 빚을 갚기 위해 이른바 '투잡'이나 '스리잡'을 뛰고 있다는 응답은 43.2%(101명)였다.

전세사기 피해는 희망의 상실, 마음의 병, 가정 불화, 사회관계 단절 등 삶 전반으로 번져 갔다. 응답자 중 46.7%(114명)는 원래 계획했던 이사나 내 집 마련의 꿈을 버렸다. 23%(56명)는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했다. 진학이나 유학의 목표를 접었다는 응답(6.1%, 15명)도 있었다.

특히 응답자의 62.7%(153명)는 가족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 매일 혹은 가끔이라도 우울감을 느꼈다고 한 주민은 92.7%(226명)나 됐다. 심지어 63%(151명)는 지금 상태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답자 절반(50.4%)은 사기를 당하고 매일같이 밤잠을 설치고 있다. 20.2%(49명)는 1주일에 2~3차례 이상 숙면을 취하지 못했으며, 38.5%(94명)는 가정불화가 생겼거나 친구·지인과 단절됐다.

응답자의 90.7%(215명)는 특별법상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경·공매가 잠시 멈춰지거나 저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사 결과에서 보듯 주민들의 일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대책이 나올 때마다 주민들은 희망을 걸어요
그러다 또 실망하는 거죠
이러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커질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절망감은 더 쌓일 수밖에 없어요….

지수는 천막 농성장에서 끝까지 버텨보자는 주민들과의 약속을 오늘도 지키고 있다.

/기획취재팀


→7편에서 계속 (하루하루 '희망의 덫' 묶인채… 이도저도 못하는 주민들)


※기획취재팀=변민철·백효은기자(인천본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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