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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천하는 인천책·(8)] 이설야 시인-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입력 2022-09-28 19:34 수정 2022-12-08 14:57

자연이 가르쳐준 말랑말랑한 詩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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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지음. 창비 펴냄. 136쪽. 2013년 2월22일 출간
시 '눈물은 왜 짠가'와 동명의 산문집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에 산다. 그는 1996년 우연히 강화도 마니산에 놀러 갔다가, 동막리 한 폐가를 월세 10만원에 얻어 살기 시작했다. 시멘트가 사방 벽이 되어 높이 올라가는 도시에서 떠나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흙'이 길을 내는 뻘밭을 품은 강화도에서 26년째 살고 있다.

시인 함민복은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독하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월성의 원자력발전소에 취직해 4년 동안 근무했는데 이때 우울증을 얻었다고 한다.

문학청년의 꿈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1987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1989년 7월 '21세기 전망' 동인 결성에 참여했다.

이 시기 다양한 동인이 활동했는데. '한국 동인시 총서'(도서출판 둥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더라도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983년 '무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이듬해 1984년 결성된 '시힘' 동인과 1989년 결성된 '21세기 전망' 동인은 서로 꾸준하게 교류해왔다.



'시힘'은 시의 서정성을 구체적 일상이나 사회문제로 확장시켜 나갔다면, '21세기 전망'은 대중문화와 시의 결합을 실험했다. 두 동인은 각기 다양한 개성을 가졌지만, 지향점이나 정체성이 서로 스며들기도 했다.

함민복 시인의 동인 활동은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1990, 세계사)과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1993, 세계사)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민복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 창비)를 출간할 즈음 강화로 왔는데, 삶의 거처를 옮긴 이후 시 세계가 '시힘' 동인의 정체성에 더 가깝게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세 번째 시집을 경계로 이전의 시는 초기시로, 이후의 시는 중기시(아직 진행형이지만)로 나눠볼 수 있겠다. 초기 시집 '우울氏의 一日'과 '자본주의의 약속'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좌절된 욕망과 부적응, 분열된 자아의 세계를 날것의 언어로 보여준다.

직장 관두고 재학중 1988년 등단
초기 시편 자본주의속 가난 그려
강화에 살면서 새로운 세계 발견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첨예하게 그렸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자크 라캉)하고, 욕망을 경쟁하고 그것을 성장이라고 믿는 사회 구조의 폭력성을 냉소적이면서도 풍자적 어조로 노래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혹은 시인 자신의 표상인 우울씨는 딱딱한 시멘트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끓여 먹는다. 도시에 어쩔 수 없이 편입된 우울씨가 '정신과를 출입한 지 3년'이나 되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보낸 4년'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도 만져보지 못한 뇌세포를 / 방사선이 스치고 지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우울씨는 아픔 뒤에 아픔을 줄 세워 접수증을 끊고 그 아픔을 다시 신경정신과에 접수'시킨다.

'곧 우울씨의 아픔이 호명'(우울씨의 일기1) 될 것이지만, 우울씨는 우울의 기초를 되물으며 '자본, 그대의 적은 그대'(우울씨의 일기4)라고 중얼거린다.

함민복 시인의 초기 시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을 그렸다면, 세 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는 문명과 반문명, 도시와 자연의 경계인 '갈림길에서 길을'(환향) 묻다가 자발적 가난의 세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후 네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문학세계사)과 다섯 번째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창비)에서는 강화도에 살면서 시인이 발견한 세계를 때로는 구체적으로, 때로는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씨앗은 우주를 이해한

마음 한점

:

씨앗을 먹고 살면서도

씨앗을 보지 못했었구나

씨앗 너는 마침표가 아니라

모든 문의 문이었구나

-함민복 詩 '씨앗' 일부-




그는 동막리 사람들과 함께 물때 달력을 넘기며 자연을 시로 베껴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일반적인 생태시와는 결이 다르다. 자연을 노래하지만, 자연에 갇히거나, 자연을 미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린다) 있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생을 온전히 받아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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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 얻은 '씨앗 하나 / 손바닥에 올려놓'고 부끄러워하는 시인에게 '씨앗은 작지만 / 씨앗의 씨앗인 희망'은 크다. 시인은 '씨앗 한톨의 폭발성'(씨앗)과 '씨앗 하나의 단호함'을 배운다. 자연은 시인에게 시를 가르쳐 주었다. 말랑말랑한 시의 힘을! 말랑말랑한 흙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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