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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천하는 인천책·(11)]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김진초 外 '인천, 소설을 낳다'

입력 2022-11-02 19:19 수정 2022-12-08 14:56

여성 작가 6인이 그려낸 '인천의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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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소설을 낳다. 김진초·이목연·양진채·구자인혜·신미송·정이수 지음. 케포이북스 펴냄. 272쪽. 2015년 11월10일 출간.
거처를 밝히지 않는 형의 흔적을 좇아 인천항에 내린 '나'는 인천항 갑문 코스라는 노선에 이끌려 시티투어버스에 오른다. 형과 함께 조합주택에 살게 된 어린 시절, 아버지는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노동자였다. 고무링으로 바지 밑단을 조이고 내복 바지를 껴입은 그는 그 속에 설탕을 숨겨 와 가족 앞에서 쏟아내곤 했다.

형은 더럽다고 먹지 않았지만 '나'는 설탕의 단맛을 거부하지 못한다. '검은 설탕의 시간'의 '나'는 아버지와 형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하며, 재개발로 인해 부두 기능을 상실한 옛 동네의 변모를 차창 너머로 목격한다.

12년을 넘게 살았던 곳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떠나게 된 고향의 끈적거리는 기억들은, 형과 함께 살갗이 붉어지도록 마른 목욕을 하는 꿈처럼 씻겨지지 않는다.

2015년 '세계 책의 수도' 선정 기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던 소설집
여우재길 등 친숙한 공간 무대로
다양한 인생 여정·애환 등 담아


'인천, 소설을 낳다'는 인천을 테마로 김진초, 이목연, 양진채, 구자인혜, 신미송, 정이수 등 6인의 여성 작가가 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유네스코는 매년 세계를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지역 도시 한 곳을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하고 있는데, 지난 2015년에 인천이 책의 도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고, 문화도시로서의 인천을 알리는 일환으로 발간됐다.

당시 책의 발문을 쓴 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여러 해 전 여성 작가들이 결성한 소설 모임 이름이 '소주 한 병'이었다는 후일담을 전하며, 그녀들의 '작명 센스'에 묻어나는 재치와 열정에 감동했음을 고백한다.



책에 실린 작품 중 '검은 설탕의 시간', '2번 종점', '은합을 열다' 등 세 편이 개인 단행본 소설집의 표제작이 되었으니 각별한 애정이 담긴 작품들이라 보아도 좋겠다.

오랫동안 머물러 친숙했지만, 이제는 낯설어진 곳으로 찾아오는 주인공들의 귀향(歸鄕)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장소와 그들이 만났던 누군가에게로 귀속된다. '너의 중력'의 주인공 현주는 지구에서 600㎞ 떨어진 우주정거장에서 동료를 잃은 우주비행사를 다룬 영화를 보며, 자신이 너무나 많은 것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믿는다.

'거기, 다다구미'의 홈스테이 방문객 수잔 마틴은 50년 만에 귀국한 미국 국적의 한국 여성으로, 그녀가 노래를 불렀던 부평 미군부대 사병클럽의 다다구미 동네를 찾는다. 그녀들은 과거의 자신들에게 열중했던 남자들에게서 멀어졌고, 그들과의 재회는 유예되거나 좌절된다. 기억에 기대어 복원되는 공간의 여정 속에서 관광객과 여행자 사이의 경계인이 된 그들은, 점점이 떠오르는 서글픈 감정의 부표(浮標)를 만지작거린다.

'여우재로 1번길'의 십정동 여우재길과 도살장 거리, '아직, 코스모스'의 쓰레기매립지, '그물에 들다'의 자월도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공간이 소설의 무대로 그려지는데, 여러 작품에서 종점이나 종착역이 설정된 점도 흥미롭다.

'2번 종점'은 하루 벌이 일용직 근로자부터 가내공업 사장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즐비한 동네가 배경이다. 중심에서 밀려난 가장(家長)들은 그곳에서 자괴감 어린 심경을 감추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가구공장 사장에서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으로 전락한 김재명씨나, 벽돌공장 사장에서 고물상이 되어 함께 단골집 식당의 여주인을 찾는 강씨의 처지는 개발이익으로 벼락부자가 된 종섭의 처지와 대비를 이룬다.

'서킷이 열리면'은 현재는 철거된 송도국제업무지구역 근처의 레이싱 서킷이 무대인데, 레이싱 연습생인 주인공의 거친 질주가 신도시의 부드러운 곡면처럼 상쾌하게 묘사된다. 소설 속에 그려진 수많은 길은 인생의 여정과 애환을 닮았다.

'겨울은 은행잎이 가득했던 가로수 길을 쓸쓸하게 만들 터였다. 하지만 부증불감이라 했던가. 실제로는 없어지는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다 했다.'(184쪽)

책장을 덮는 소회의 실마리를 나는 '은합을 열다'의 이러한 문장에서 찾았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실감에 시차가 생기는 건, 독자의 기억 속에 특별한 이야기를 심어주는 작가들의 노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나의 도시가 오롯이 한 권의 책에 담겨있다는 점도 매혹적이지만, 이들에게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으며, 지금 우리들의 도시가 새로운 소설의 특별한 시작일 수 있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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