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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2)] "이유 없이 사람 잡아간 책임자들은 꼭 대가 치르게 해야"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기자 jebo@kyeongin.com
입력 2022-11-21 20:45 수정 2023-01-16 10:45

5년이 바꾼 59년, 수명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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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 시설에 수용된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
 

하수명(59)씨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두 부랑아 수용시설은 어떤 곳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죽을 때까지 맞는 곳'이라 표현했다. 죽을 때까지 맞아야 했던 그 곳에서 수명씨 나이는 고작 10~14살 무렵. 선감학원서 나온 지 50년 가까이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 처참한 기억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또렷하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정말로 죽다 살아났어요. 매일 낚시공장에 투입됐는데, 30분마다 직원이 작업량을 확인하러 다녔어요. 30분간 10개를 만들라 했는데, 10개를 못 채우면 못 채운 숫자대로 손바닥을 맞았어요. 제가 작업량을 계속 못 채우니까 직원이 손바닥을 있는 힘껏 때리는데,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어요. 그러니까 몽둥이로 머리랑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어요. 몸이 조그마하니까 이쪽으로 던지고 저쪽으로 던지고 그랬죠. 계속 맞다가 '그냥 날 죽이라고' 생각이 들 때쯤 기절했고 그제야 매질이 끝났어요. 일하다 쉴 때도 하루에 수십 대씩 맞았어요. 지옥 그 자체였죠." 

"죽을 때까지 맞아야 되는 곳" 기억
공장 할당량 맞추지 못할 때 '매질'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2년은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시설 수용 인원이 가득 차 수명씨는 전원이 결정됐는데, 그렇게 간 곳이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도 폭력으로 얼룩지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만 먹고 자란'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선감학원에선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순응해야만 죽지 않는다는 걸 저절로 깨달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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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명(59)씨가 선감학원에서 '말을 잘 듣지 않게 생겼다'는 이유로 학원 직원에게 머리를 잡힌 채 바리캉으로 맞아 생긴 흉터. 그는 선감학원에서 폭력을 당한 지 40여년 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머리에는 흉터가 선명했고, 그 날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선감학원은 기강 잡는 직원들이 있어요. 말을 잘 안 듣는 얘들은 걸리면 죽도록 맞는 거예요. 그래도 형제복지원처럼 밤낮 안 가리고 때리진 않았고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규칙에 따라 행동했어요. 근데 어느 날 '꼴통' 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맞았어요. 머리채를 잡고 '가만히 있어'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아아' 소리를 냈더니 바리캉으로 '꽝' 소리 나게 찍으며 때렸어요. 지금도 맞은 상처 부위는 머리털이 안 나요. 그래도 선감학원은 천국이라 생각했죠. 아무리 때리고 힘들어도 삼시 세끼는 주고 재워주니까."

삼시세끼라 해도 원생들이 주식으로 먹던 꽁보리밥과 반찬은 모두 선감학원 일대에서 원생들이 직접 재배해야 했고, 매일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삼시 세끼 준다고 좋아했지만, 먹는 음식은 우리가 직접 길러서 먹었어요. 하루 3시간씩 밭일을 했거든요. 김치, 양배추 같은 걸 주로 재배해 먹었어요. 일부 원생들은 소랑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 끌려가 일을 했는데, 정작 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온 적은 거의 없었어요. 가끔 대통령 하사품으로 과자와 사탕이 내려와 그때 특별하게 단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았죠."

끼니 꽁보리밥·반찬 재배 강제노역
멀쩡히 부모 있어도 수집에 끌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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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냉장고. 인권유린 시설 입소로 삶이 망가지고, 혼자 살다 보니 그의 냉장고는 갖은 반찬 없이 비어있었다. /김동현기자 kdhit@kyeongin.com
 

그는 '자유'를 찾아 선감학원을 탈출했다. 형제복지원보단 낫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폭력과 통제는 같았다. 매일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명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맞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먼저 탈출한 원생이 다시 돌아와 도와줄 테니 같이 나가자 해서 인천으로 나가는 배에 몰래 들어가 탈출했어요. 그런데 (나와 보니) 막상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이후의 삶도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어둡게만 살아갔죠."

수명씨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용된 이유도 '부랑아' 같아 보여서였다. 정작 그는 부랑아가 아니었다. 멀쩡히 부모가 있었고 집도 유복한 편이었다. 새어머니의 구박에 집을 나와있던 시간이 많았고 그러던 찰나 부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랑아 수집에 잡혀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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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부산 형제복지원 2년, 선감학원 3년 총 5년 동안 인권유린 시설에 갇혔던 하수명(59)씨의 손.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선감학원을 탈출했지만, 제대로된 교육과 국가 행정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식당일 20년, 구두닦이 20년, 막노동 5년 등 생활고에 시달려 단 하루도 쉬지 못한채 갖은 노동을 겪으며 손이 멍들고 퉁퉁 부어있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그의 몸은 45년 전 선감도를 탈출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얽매여 자유를 찾지 못했다. 수명씨는 이유 없이 자신을 가두었고, 인권을 짓밟은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 그리고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며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보상을 받아봐야 제가 얼마나 받겠나 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러나 나 말고도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담당자들, 책임자들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의 한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콘텐츠팀 김동현 기자

 

■사람을 찾습니다


▲1956~1982년까지 선감학원에서 일했던 교사 및 직원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1974~1976년, 선감학원 내 양호실에 근무하며 구타당해 머리를 다친 수명씨를 치료해준 간호사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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