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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경기남부 대표 고인돌 ‘모현지석묘’

우장문 기자 발행일 2015-09-15 제18면

청동기시대 ‘1500명 거주 마을’ 추정

▲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의 모현지석묘. /대지중
▲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의 모현지석묘. /대지중
인근 산·들·강… 사람 살기 적합한 환경
군집 안이뤘을뿐 세계유산급 위용 뽐내


우리나라에는 남한산성, 조선 왕릉, 화성 외에도 많은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00년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고인돌 중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나라의 많은 고인돌 중에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만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일까요? 이유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갖춘 고인돌이 가까운 지역에 많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 이외에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고인돌이 전국에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모현지석묘입니다. 경기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모현지석묘(고인돌)도 모양이나 크기로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에 전혀 뒤지지 않을 유산입니다.

모현지석묘는 경기 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위용을 자랑하는 탁자식 고인돌로,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498에 있습니다. 이 고인돌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74년에 이미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이 고인돌을 보기 위해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진입로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100m 정도만 가면 왕산리에서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건물이 많아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350m 정도 앞에는 한강으로 합쳐지는 물줄기인 경안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에 서서 청동기 시대로 돌아가 주변 모습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자연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안천에서 고인돌이 있는 곳까지는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어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뒤쪽으로는 세골산, 왕구리뒷산 등이 이어져 있어 사냥하기에도 쉬울 뿐 아니라 경안천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먹거리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곳에 많은 사람이 생활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동원돼야 축조 가능했을 모현지석묘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 왕산리에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 두 기가 5.5m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 크기가 길이 460㎝, 너비 380㎝, 두께 95㎝입니다. 이 덮개돌은 무게가 30t 이상이어서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옮기는 데에는 300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참여했던 300명을 성인 남성으로 추정하고 5인 가족 중 1명씩 동원됐다고 계산한다면 당시에 1천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인근에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던 지역에서 300여 명을 동원해 고인돌을 만들 수 있었다면 고인돌에 묻혔을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권력이 막강했던 부족장 정도의 힘을 가졌던 지배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인돌은 계급이 등장했던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당시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 고고학입니다.

어떤 유적을 답사할 때 현재의 모습만을 살필 것이 아니라 유적이 만들어졌을 당시 세계로 돌아가 당시 사람 입장에서 유적을 본다면 재미있는 답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자랑인 모현지석묘 옆에 예쁘게 단장된 벤치에 앉아 당시 세계로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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