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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융건릉’

경인일보 발행일 2015-10-20 제18면

사도세자와 함께 잠든 ‘정조의 효심’

양주에 방치된 부친 묘 명당으로 옮겨
임금의 울분·정치적 성취감 녹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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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잠들어 있는 융릉. /부흥고 제공
영화 ‘사도’가 끝나갈 무렵 왕위에 오른 정조가 누군가의 무덤 앞에 엎드려 풀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속 가상 장면이지만 상황을 통해 짐작해 봤을 때 그 무덤의 주인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옆에는 남편이 죽은 지 33년 만에 처음으로 무덤을 찾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도 있었지요. 그 무덤은 오늘날 화성에 있는 융릉이랍니다.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날 때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륭원으로 이름을 붙였다가 융릉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1899년이었답니다.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장조로 부르고 무덤도 융릉으로 승격해 부르도록 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조가 아버지 무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융릉은 대개 건릉과 함께 융건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힌 융릉 근처에 그의 아들 정조 부부가 잠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지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 옆에 그렇게 죽어가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영조)에게 떼를 쓰며 매달렸던 11살의 정조가 훗날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같은 곳에 묻혀있는 것이랍니다.

지난 1776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며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13년이 되던 해인 1789년에 양주 배봉산 기슭에 방치된 아버지의 묘를 지금의 장소로 옮겼답니다. 그때는 왕의 무덤이 아니어서 현륭원이라고 불렀지요.

한때는 효종의 무덤 자리로 추천됐을 만큼 천하의 명당자리로 여겨졌던 이곳으로 무덤을 옮기면서 왕릉에 버금갈 정도의 정성을 쏟았답니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을 두르고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과 무인석도 설치했답니다.

지금처럼 단풍이 곱게 물든 음력 10월 늦가을의 일이었지요. 왕위에 오른 후 언제가 실천에 옮기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마침내 이뤄낸 것이었습니다.

정조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옮긴 것은 효심 가득한 집안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랏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데 힘을 보탠 노론 대신들에게 보란 듯이 벌인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1794년 현륭원 근처에 화성을 짓도록 명하였고 공사가 끝나갈 무렵 화성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겉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축하하는 잔치였지만 동갑이었던 아버지의 회갑잔치이자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궁에 머물던 이틀째에는 장용영 군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훈련을 밤낮으로 지휘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노론 대신들에게는 엄청난 위기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정조가 의도했던 정치적 목적을 이룬 셈이었지요. 그런 이유로 이곳은 화성만큼이나 정조에게는 의미 있는 곳이었습니다.

정조가 이곳 융릉을 찾아 흐느끼며 흘린 눈물에는 안타깝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마음에 담아 뒀던 울분, 강력한 왕권을 일궈내는 과정에 느낀 긴장감과 성취감이 녹아 있었을 것입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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