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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리 지영희 선생 옛 집터. /한광중 제공 |
오케스트라 조직 기반다져
고향 만호리에 옛집터 남아우리나라 국악은 구음(口音)으로 전승됐습니다. 국악이 오선지에 그려진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국악이 오선지에 그려지면서 체계적인 전승이 가능해졌습니다. 쌀자루를 등에 지고 심심산골에 묻혀 사는 선생님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악보만으로도 소리를 전수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국악오케스트라도 해방 이후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국악기는 서양악기와 연주법이나 음색이 달라 오케스트라 편성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던 일을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영희 지천만입니다.
지영희는 평택시 포승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업(巫業)을 했던 당골네(丹骨)였습니다. 지영희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춤과 노래, 악기를 익혔습니다.
나중에는 이석은, 정태신, 최군선과 같은 스승에게 승무와 검무, 호적, 양금, 해금, 대금, 피리 등을 배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영희는 민속과 무속을 아우르는 수준 높은 음악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지난 1937년 지영희 선생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춤꾼 한성준 선생의 조선 음악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일제 말에는 한성준, 최승희 무용단과 국내외 공연을 하며 음악적 안목을 넓혔습니다.
당대 가야금 산조의 최고 연주자였던 부인 성금연과도 만났습니다. 지영희를 대표하는 악기는 해금과 피리입니다. 지영희의 연주는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는 지영희류 해금산조, 피리산조, 시나위를 창안해 반주악기로만 인식돼 온 해금, 피리, 태평소를 독주악기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삶은 해방 전과 후로 나뉩니다. 해방 전에는 주로 연주자로 활동했다면 해방 후에는 연주자 외에도 작곡가, 교육자,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국악현대화와 후진양성에 이바지했습니다.
지영희는 현대국악이 살 길은 국악을 서양음악처럼 오선지에 옮기고 국악오케스트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자전거를 타고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민속 음악을 채보해 오선지에 옮겼습니다.
한국전쟁 뒤에는 박헌봉, 박귀희 등과 국악예술학교 설립에 앞장섰습니다. 후진양성을 하지 않는 한 국악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악오케스트라단 창립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62년 ‘악성 추모제’ 때 국악예술학교 교장 박헌봉의 권유를 받아들여 국악예술학교 학생들로 국악오케스트라를 조직했습니다.
지영희는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뒤 창작관현악곡 ‘청하지곡’을 초연했습니다. 국악기에 부족한 음(音)을 얻기 위해 공후, 비파와 같은 악기를 개량하기도 했습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했고, 이를 모태로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했습니다.
지영희는 1972년 김소희, 성금연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경기시나위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됐습니다.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에는 지영희선생의 유허가 있습니다. 또 평택시에서는 지영희국악예술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평택시 한국소리터 주 공연장의 명칭도 ‘지영희 홀’입니다. 이처럼 평택지역에는 국악현대화의 선구자 지영희선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김해규 한광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