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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낮지만 큰 울림 '낮은 목소리'

경인일보 발행일 2016-01-08 제16면

위안부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
분노·연민 아닌 '역사' 담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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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 감독의 음성이다. 젊은 변영주 감독은 담담하게 다큐멘터리의 제작 동기를 밝힌다. 기생 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감독은 요정에서 일하는 한 여성을 알게 됐고, 곧 그녀의 어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요정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속에서 암전이 흐른다. 그 잠깐의 침묵이 감독에게는 오랜 혼돈과 질문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성적 착취의 대물림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그 고리는 왜 끊어지지 않는가? 암전 위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간략한 자막이 지나면 1993년 12월 23일의 풍경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백 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날이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는 호들갑스럽지 않다. 쉬운 분노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값싼 연민의 감성에 젖어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시종 담담하게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생활과 증언을 담아낸다. 선정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꿈과 그리웠지만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의 남은 소망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할머니의 주름진 몸을 더듬으며 끝을 맺는다. 그 주름 속에 깃든 것이 단순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가치가 배제된 자연의 시간도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일구고 만들어낸 인간의 시간, 바로 '역사'일 것이다. 그 주름 속에서 개인의 시간은 역사로 흘러든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이듬해인 1992년 8월부터 시작된 수요집회는 24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1천 회를 훌쩍 넘긴지도 꽤 됐다. 몇몇 할머니들만이 초라하게 모여 항의하던 그곳에는 지금 소녀상이 서 있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소녀에게 추운 날이면 누군가 털모자와 목도리를 걸쳐주기도 한다. 영화의 말미에 한 할머니는 "우리는 피해 배상을 바라는 것이지 위로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뜻을 밝힌다. 역사가 흘러간 과거 속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열린 미래를 향한 공동체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오래 전의 다큐멘터리를 다시 꺼내 보며 소녀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짚어보게 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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